여러분의 직업은 여러분의 사역입니다
오늘 아침의 제 메시지의 핵심은 선언으로 그리고 기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선언으로 말해 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직업의 요구를 어떻게 성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기독교 제자도의 필수 부분입니다. 혹은 이를 다른 방법으로 말해 보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직업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순종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기도의 형태로 표현해 보면, 오늘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때 아버지의 임재를 의식할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시며, 직장에서 만나고 형성하는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소서. 저는 이것이 오늘 우 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고린도전서 7:17-24로부터 몇 분 동안 이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 로 지내라
이 성경 본문을 읽기 전에, 그 앞에 나오는 본문의 문 맥을 살펴 봅시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문제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일상의 생활에 영향을 미쳐야만 하는가였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장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부부 사이의 성적 관계를 금하는 것을 의미하여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바울은 3절에서 결코 아니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12-16절에는 다른 문제가 제기됩니다. 즉 배우자 중 한 명만 신자인 경우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신자는 청결을 유 지하기 위하여 배우자를 떠나 보내야 하는가? 다시 바울은 아니라고 대답합니 다. 부르심을 받은 그 관계 안에서 그대로 지내라.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믿음은 창조시에 하나님이 명하신 결혼의 언약을 결코 파괴하지 않을 것 이다.
하지만, 12절과 13절에서 그렇게 말한 후, 사도는 만일 불신자측에서 신자인 배우자를 버리고 더 이상 그와의 혼인관계를 유지하기 원 치 아니하거든, 신자는 영원히 그 혼인관계에 묶여 있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온 것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관계 들을 내버리기 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들을 거룩하게 합 니다. 오래 참음과 기도와 겸손하고 모범적인 행동으로, 신자인 배우자는 불 신자의 영혼을 얻기를 소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34에서 예측하신 바대로, 믿지 않는 배우자의 반역과 불신앙은 기독교 신앙을 검과 같이 작용하게 할 것입니다. 즉, 치료하는 평화의 향유가 아니라 베어내는 검이 되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따르고 있는 원칙은: 하나님이 명하 신 인간관계들 속에서 그대로 지내고, 그 관계들을 버리거나 파괴하지 말라 . 하지만 그 관계가 신자측의 바램이나 의도와는 별개로 불신자측에 의하여 파괴되거나 버려지는 경우에는, 그렇게 하여라. 관계의 파괴에 대하여 책임 없는 신자는 버리는 자에게 얽매여 있지 않다.
여기 고린도전서 7:17부터 오늘의 본문은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시점에 이미 존재 하는 결혼 관계, 바로 하나님의 주권하에 이루어진 결혼 관계 안에 계속 머 물러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 후, 바울은 이제 다른 두 관련된 것들 안에 서 이 원칙을 확장해 나갑니다. 고린도전서 7:17-24를 읽겠습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 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 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 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 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 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 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바울이 이미 결혼과 관련하여 가르친 원칙이 여기 세 번이나 명확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17절을 주목하십시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그리고 20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 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그리고 24절,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 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바울의 원칙에 대한 이 세 번의 선언은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마치 (빅맥 같이) 두 개의 고기층이 있는 이중 햄버거의 세 조각 빵을 연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위에 있는 두 조각 사이에 있는 구절은 18절과 19절입니다. 여기에서는 그 원칙이 할 례와 무할례의 이슈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두 조각 사이 에 있는 구절은 21-23절입니다. 여기서 그 원칙은 종과 자유인에 대하여 적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두 가지 적용들 중 어느 하나라도 이 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원칙 그 자체 안에 있는 핵심 단어를 명확하게 규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종류의 부르심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이 원칙을 선언할 때마다 등장한 단어는 "부르심"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이 단락에 모두 아홉 번이나 등장합니다. 17절에서 "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 하라", 24절에서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믿게 부르시는 신적 부르심을 지 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직업을 지칭하는데 "부르심" 혹은 "소 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나의 소명은 주부이다, 나의 소명 은 판매사원이다 등등의 말을 사용합니다. 바울이 아홉 번 "부르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중에서 여덟 번은 그러한 용도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아홉 번 중 딱 한 번만 그러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20절에서만 그러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문자적으로 2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 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그 상태 그대로 지내라고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그대로 지내라." 여기서 "부르심"이라는 단어는 직업 혹은 삶의 상태를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 직업 혹은 삶의 상태 안에서 또 다른 부 르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게 됩니다. 이 부르심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으로 이끌어 당기시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 사람에게 그의 직업 안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영혼을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심시키 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이 사실이 아주 명확하 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 9절을 보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 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라고 기록되 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오 직 그리스도인들만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이 부르심은 한편으로 우리의 직업상의 "부르심"과 다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회 개로의 일반적 부르심과도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2:14에서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 께서 염두에 두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자신의 운명에 따라 거절하는 일 반적인 외적인 복음의 부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염두에 둔 것은 이 외적 부르심이 아닙니다. 우리를 예수님과 교제하게 하시 는 그러한 능력 있고, 유효한 부르심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신 뢰와 사랑 가운데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는 부르심입니다. 우리를 아들에게로 이끄시는 부르심입니다(요한복음 6:44, 65). 이것은 고린도전서 1:23, 24에서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기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 함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을 듣고 이를 지혜로 받는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일반적 부르심과 유효한 부르심의 차이가 잘 드러나게끔 이 구절들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 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도록 모든 사람을 부르나, 많은 유대인들에게 이 부르심이 거리끼는 것이며, 많은 이방인들에게 이 부르심이 미련한 것입니 다. 하지만 부르심을 받은(즉, 능력있고 유효하게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린) 자들은 이 복음의 부르심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7:17, 20, 24에서 우리는 부르심을 입 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회심 할 때 있었던 상태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그의 아들과의 믿음과 사랑의 교제로 이끄셨을 때 우리가 처해 있던 상태 그 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적용되는 원칙
이제 우리는 바울 사도가 이 원칙을 그의 시대에 어떻게 적용 하였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도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학적 근거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바울이 이 원칙을 처음으로 적용한 것은 직업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할례와 무할례에 관해서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방인으로 회심하였다면, 유 대인이 되려고 하지 말라. 네가 유대인으로서 회심하였다면, 이방인이 되려고 하지 말라. 이는 기본적으로 할례와 무할례가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 화적으로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마치 네가 흑인이라면, 백인이 되고자 하지 말고, 네가 백인이라면, 흑인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예 를 들어, 네가 멕시코인이라면, 미국인이 되려고 하지 말고, 네가 미국인이 라면, 멕시코인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은 이 훈계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19절은 문자적으로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 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 말입니다. 할례 받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뇨. 이 구절 은 넓은 문화적 적용을 갖습니다. 우리가 이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는 우리 모두의 기분을 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는 진리입니다. 여러분의 문화적 차이를 보존하는 데 대한 바울의 근거가 우리 현 시대에 존재하는 근거와 얼 마나 근본적으로 크게 다른지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피부색 이 하얀 것은 아름답다, 검은 것은 아름답다, 붉은 것은 아름답다, 황색인 것은 아름답다, 그러니 너의 문화를 다른 문화로 교체하려고 하지 말라. 바 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부색이 하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검은 것은 아 무 것도 아니다, 붉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황색인 것은 아무 것도 아니 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너의 문화를 다른 문화로 교체하려고 하지 말라. 여러분이 있는 곳에 머물러서 하나님께 순종하 라. 바울은 생각과 사상에 있어 유행을 좇지 않기 때문에, 그의 생각은 시대 를 불문하고 영원히 적절성을 갖습니다. 바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입니 다. 하나님에 대한 우선 순위 앞에서 모든 것이 뒤로 밀려납니다.
우리가 새로운 형태의 율법주의를 만들지 않으려면 이 개념을 바로 붙잡 는 것이 매우 긴급하게 요구됩니다. 구 율법주의는 말하길, "할례를 받지 아 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사도행전 15:1). 받아들여지려면 백인이어 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신 율법주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구원받기 원 한다면 할례받을 수 없다. 받아들여지려면 백인일 수 없다." 우리가 "할례받 지 않은 자들은 할례받지 않게 하자"(18절)라고 한다면, 그리고 이를 문화 적 적응에 있어 절대적 금지사항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 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문화의 어떤 면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문화를 버 리는 사람 모두에게 무차별적인 정죄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할례받게 한 사실(사도행전 16:3)을 보면 이는 명백합니다. 그리 고 바울이 말한 바에 의하면, 그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22)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 그 어떤 문화적 독특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며, 이러한 문화적 독특성들을 단 지 바꾸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전혀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를 받든지 안 받든지, 백인이든 흑인이든 홍 인이든 스웨덴인이든, 이런 문제들을 그렇게 크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순종을 큰 문제로 여기고, 하나님의 도덕법을 순종하는 것을 삶의 전 체 목표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할례라든가 기타 다른 문화적 독 특성들이 믿음의 순종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으로서 매우 이차적이고 파생적 인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울이 문화적 독특성들에 이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너희의 현재 상태에 서의 문화적 독특성에 너무 안달하지 말고 자랑하지도 말라. 그것들은 네가 하나님께 영혼과 마음과 몸을 드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데 헌신하는지에 비하여 훨씬 덜 중요한 것들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마서 13:8-10, 갈라디아서 5:14)라는 말씀 안에서 성취된다 .
종과 자유에 대한 적용
그 후, 바울은 21-23절 에서 그의 원칙을 종과 자유에 관한 이슈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21절에서의 번역 문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현대 성경 버전은 이렇게 기록합니 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이러한 번역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만, 저는 이러한 번역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를 들고 있는 원칙은 20절에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 심 그대로 지내라" 와 같이 표현되어 있고, 2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각 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와 같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완전히 부적당합니다. 그 뿐 아니라, 이러한 번역 은 헬라어 원문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들에 대하여 정당하게 취급한 것이 아닙 니다. 예를 들어, 헬라어에서 등장하는 "even", "rather" 의 뜻을 갖 을 수 있는 헬라어 단어들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또 다른 대안이 되는 번역은 이렇습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이에 신경쓰지 말라 네가 자유자가 될 수 있다 할지 라도, 차라리 (너의 현재의 포지션을) 이용하라." 진짜 대조는 "너의 종된 상태가 너를 근심하게 하지 말고, 대신에 그 상태를 이용하라"와 같이 표현 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를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위하여 이용하라. 그래 서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라(디도서 2:10).
이 는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18절이 할례를 절대적으로 금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 을 자유를 구하라는 명령으로 번역한다면, 이 구절의 진짜 핵심이 모호하게 되어버립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제 안으로 부르심 받을 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우선순위 체계들을 새로이 얻는 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으로 있는 것도 안달할 거리가 아닙니다. "네가 종 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개의치 말라." 너는 하찮은 직업을 갖고 있느냐? 개의치 말라. 네 직업은 다른 직업들처럼 높이 평가받지 못하느냐? 개의치 말라. 바울은 할례와 같은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도 동일한 요점을 말 하고 있습니다. 너는 할례받지 않았느냐? 개의치 말라. 너는 할례받았느냐? 개의치 말라.
19절에서 할례 문제에 대하여 한 것처럼 이 요점에 대해서도 바울은 완전히 동일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종인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자유자인 것 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정말로 그 렇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새로운 신학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이해를 더 깊게 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종이라도 "개의치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22절,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유인이라도 "개의치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와 유사합니다: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 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바울이 그의 신학이 이처럼 작용하게 하는 것을 보는 것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그는 복음 안에는 하찮은 직업으 로 인한 낙담을 위한 해독제가 있으며 존경받는 직업으로 인한 교만을 위한 해독제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망이 없다고 느낄 수 있는 종을 돌아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자유자이다. 너는 값으로 산 자이다. 아 무도 너의 영혼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하라.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바라라. 그러면 너는 모든 근심하는 귀족들보다 더 자유롭게 될 것이다" 라 고 말합니다. 그 후, 그는 귀족인 자유인을 돌아보면서 "교만하게 되지 말라 . 왜냐하면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기 때문이다. 네 위에 권위를 가지신 분이 계시다. 그러니 너는 겸손하고 복종하여야 한다."
결국 바울 이 말하는 바는, 누가 종이든 자유자이든, 그것이 낙담이나 교만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개의치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사이든 변호사이든 사장이든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회에서 천시하는 직 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기연민을 갖거나 의기소침해서는 안됩니다. 24절 에서 덧붙이기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 께 거하라." 하나님과 함께! 여기 가장 중요한 어구가 나옵니다. 삶에 있어 서 그리고 영원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거하는 것 이고 그의 임재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우리 직업이 높거나 낮 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인하여 격려되고 겸손하게 되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합니다.
바울의 두 가지 적용을 함께 종합하여 보면, 이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19절)과 그의 임재를 즐거워하는 것(24절)은 네 문화나 네 직업이 무엇이냐보다 너무 너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너는 네가 처한 처지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요를 느끼지 않아야 한다. 너는 두려움이나 실망에 의해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나려 고 해서는 안 되고, 부나 교만에 의해 다른 처지를 향해 유혹되어서도 안 된 다. 너는 지금의 너의 처지에 대하여 "개의치 않는다. 너는 나의 생명이 아 니다. 나의 생명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의 임재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이 갖는 실제적 영향 네 가지
이제 몇 가지 실제적인 적용과 함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첫 째, 하나님은 여러분이 새로운 직업을 갖는지 여부보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직업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하여 훨씬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간호사, 교사, 목수, 화가, 비서, 도서관 사서, 변호사, 리셉셔니 스트, 회계 업무 종사자, 각종 수리공, 사무실 관리직, 웨이트리스, 배관수 리공, 판매 사원, 경비원, 의사, 군무원, 상담자, 은행원, 경찰관, 음악가 , 주부, 선교사, 예술가, 건축가, 목회자, 학교 경영자, 청소원 등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한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옮기는 여부가 아니고, 우리의 현 직업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된 임재를 즐거워하고 일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지 여부입니다.
둘째,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회심할 때 속해 있었던 직업 안에 거하라는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직업을 바꾸는 것을 모조리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cf. 15절)에서 원칙의 예외를 허락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은 그러한 직업 전환을 묘사하고 승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 약에는 종을 자유하게 하는 것에 관한 규례가 있으며, 세리였다가 설교자가 된 사람, 어부였다가 선교사가 된 사람 등의 예를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어떤 직업은 이에 계속 거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춘이라든가 여러가지 유형의 외설 적이고 타락시키는 엔터테인먼트라든가, 기타 사람들을 죄짓게 꾀어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직업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직업적 도둑이라든가 고린 도의 이방종교 매춘부더러 회심할 때 속했던 직업에 계속 거하라고 말하고 있 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에서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올 때,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바울의 답은: 그 직업 안에서 하나 님과 함께 거할 수만 있다면 너는 직업을 버릴 필요는 없다. 바울의 관심사 는 직업 전환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업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아주 인기 없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세상적인 야망을 건드리기 때 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성공에 대하여 얘기할 때 우리가 말하는 성공의 개념이 성경적인 것인지 아니면 단지 미국적인 것인지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위 로 올라가기 위하여 쏟고 있는 모든 야망과 욕구를 취하고, 대신에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고 성경에서 계시된 그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개간하기 위한 영적인 열심에 이를 쏟으라.
셋째, 아직 직업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은 젊은 친구들을 위해 이 본문이 가져다 주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무엇 이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가?" 스스로에게 자문할 때, "그의 뜻은 내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유지하고 내 자신을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데 헌신하는 것이다"라는 또렷하고 우렁찬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된 뜻(순종할 책임이 있는 유일한 뜻)은 여러분의 거 룩함(데살로니가전서 4:3)이지, 여러분의 직업이 아닙니다. 전심으로 이에 여러분을 헌신하고, 어떤 직업이든 원하는 직업을 취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젊은 친구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거하고 성경의 계명에 순종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면, 하나님은 정확히 그가 원하시는 바 하나님을 위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곳들로 그들을 세상 속에 흩어 배치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넷째, 이 본문은 여러분의 현재의 직업은, 여러분이 거기에 있는 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눠 주신 것임을 의미합니다. 17절은 말씀하길,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 로 행하라." 하나님은 주권적이십니다. 여러분이 현재 있는 곳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 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언 19:21).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언 16:33).
여러분은 신적인 할당에 의하여 지금 있는 곳에 있습니다 . 비록 속아서 그곳에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제 직업이 하나님께서 제게 할당해 주신 제 사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직업은 여러분의 사역 할 당입니다. 여러분이 주일에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와 마찬가지로 평일에 여러분 이 여러분의 직업의 요구를 어떻게 달성하느냐 하는 것은 삶에 있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에게 있어 이는 내일 아침에 새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일터로 출발하기 전에 모두 기도하도록 합시다. "하 나님, 오늘 저와 함께 가 주시고 제가 주의 임재를 의식하게 유지시켜 주소 서. 제가 낙심하려 할 때 제 마음을 격려하여 주시고, 제 마음이 높아지려고 할 때 저를 겸손케 하소서. 오! 하나님, 주의 계명을 순종하는 은혜를 주소 서. 주의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 안에 모두 요약되어 있 다는 것을 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