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파트 2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오늘 거듭날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지난 주의 메시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요한복음 3: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그리고 3절에서 니고데모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거듭나는 데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거듭남이라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 어떤 시시한 작은 문제, 혹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선택 사항, 혹은 화장과 같이 겉치레에 불과한 문제가 아닙니다. 거듭남은 장의사들이 시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하는 시체 화장술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영적 생명의 창조이지 생명을 모방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는 거듭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을 다루었습니다: 1) 거듭남 안에서 영혼에 생기는 변화는 종교 생활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정도의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가 갖지 못하였던 전혀 다른 본질의 새로운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2) 거듭남 안에서 영혼에 생기는 변화는 단지 예수님 안에 있는 초자연적인 것을 사실로 믿고 이를 확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 속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새로운 생명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으며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하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다룬 두 개의 포인트를 합쳐서 생각해 볼 때, 니고데모가 필요로 하였던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통하여 초자연적으로 분여되는 새로운 생명이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는 영적이며 동시에 초자연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 마음과 두뇌의 자연적인 생명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언가입니다.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도 일종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육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영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영이 되려면, 혹은 영적인 생명을 가지려면,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육은 일종의 생명을 줍니다. 성령은 다른 차원의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두 번째 종류의 생명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우리는 지난 시간에 마치면서, 두 개의 매우 중요한 것을 주목하였습니다: 거듭남과 예수님과의 관계, 그리고 거듭남과 믿음과의 관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6). 사도 요한은 말하길,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따라서 한편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거듭남은 "아들 안에"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생명이십니다. 여러분이 그를 소유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영적 생명,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요한복음 6:63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따라서 여러분이 성령으로 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한복음 3:5).
따라서 우리는 우리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과 연결됨으로써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생명을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안에서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연합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존 칼뱅은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과 유효하게 연합시키시는 결합이 되십니다" (기독교강요, III, 1, 1).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됨
우리는 이와 같이 믿음에 연결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0:31은 말씀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요한일서 5:4은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남—승리의 열쇠. 믿음-승리의 열쇠.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을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의 메시지 전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 안에서, 성령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십니다.
거듭남: 옛 것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임
이제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세 번째 대답을 다룰 차례입니다.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옛 인간성의 개선이 아니며 새 인간성—참으로 당신이면서, 용서받고 씻음받은 인간성이며 참으로 새로운 인간성이며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당신 안에 형성되는 인간성—의 창조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이와 같은 관찰에 도달하게 된 여정으로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3:5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라는 어구를 통하여 의미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교단에서는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방법으로서의 물세례를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거룩한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기초가 되며, 성령 안에서 생명으로 가는 출입구이며, 그 밖의 다른 성례들에 접근하는 문이 된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속이 되고, 교회로 받아들여지고, 교회의 사명을 분담하게 된다. "세례는 말씀 안에서 물을 통한 거듭남의 성례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렇게 가르침받고 있습니다. 즉 세례가 거듭남을 일으킨다고 가르침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는 전 지구적으로 거대한 비극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가르침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는 무엇을 의미하셨던 것일까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물"은 왜 세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의 "물"이 세례의 성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몇 가지 이유를 이제부터 제시하겠습니다. 이로부터 여러분은 그 문맥이 어디로 이끄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1) 3장의 나머지 부분에 세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첫째, 만일 이것이 세례에 관한 언급이었으며,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듭남에 있어 세례가 필수적이라면, 예수님께서 3장 나머지 부분에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게 되는지 여러 차례 말씀하시면서도 세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시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15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8절: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만일 세례를 받는 것이 영생에 필수적이라면, 믿음과 함께 세례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2) 세례는 바람의 비유와 맞지 않습니다
둘째, 거듭나는 것이 물세례와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면, 8절에 나오는 바람의 비유는 모순적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거듭남을 일으키시는 데 있어 바람처럼 자유로우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기에게 세례의 물이 뿌려질 때마다 거듭남이 일어난다면, 그 말씀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 경우 바람은 성례에 의하여 좌우되고 제한될 것입니다.
3) 세례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꾸짖으신 것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세례식을 언급하신 것이라면,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10절에서 "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 말씀이 성립하려면, 예수님은 이미 구약에 가르쳐진 것인데도 니고데모가 모르고 있었던 것을 지적하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중에 직접 제정하실 성례로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그 의미를 취하는 세례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이라면,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것도 모르느냐고 니고데모를 꾸짖으신 것은 상당히 이상하게 보입니다.
4) 물과 성령은 새 언약의 약속 중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10절에 나오는 것과 동일한 선언은 구약에서 배경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36장에 특히 기재된 것과 같이 구약에 등장하는 새 언약에 대한 약속들에서 물과 성령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곳으로 같이 가 보도록 합시다. 이 본문은 이 메시지 나머지의 기초가 됩니다.
에스겔 36장의 물과 성령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귀환시키실 때 그 백성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실 것인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단지 그 때의 백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더 거대한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새 언약을 그의 피로 확보하시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22:20). 그리고 이것은 예레미야 31:31에 기록된 것과 같은 새 언약을 표현한 것입니다. 에스겔 36:24-28: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저는 이 말씀 때문에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28절)라고 말씀하십니까? 25절: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26절: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라고 말씀하신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은 옛 것의 씻음과 새 것의 창조와 관련된 새로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물과 성령"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의 새로움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측면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새로운 영 혹은 새로운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자아—이기를 멈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는 거듭나기 이전에 존 파이퍼라는 개별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끗하게 씻기는 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만일 옛 인간, 존 파이퍼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면, 용서라든가 깨끗하게 씻기는 일 등이 전혀 필요없고 심지어 부적절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미 용서되거나 깨끗하게 될 만한 대상 자체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기에 깨끗하게 씻기는 일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옛 사람이 못박힌다는 표현(로마서 6:6)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게 죽었다는 표현(골로새서 3:3)도 있고, 우리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마서 6:11)로 여기라는 표현도 있고, 옛 사람을 벗어 버린다는 표현(에베소서 4:22)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표현 중 어느 것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연속성이 부인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말하자면, 일생을 통틀어 존재하는 인간의 연속성이 부인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위의 성경구절들의 의미는 옛 본성, 옛 성품, 혹은 옛 원리, 옛 성향 등이 있었으며 이런 것들은 제거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 새로운 본성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여전히 우리 자신이고 따라서 용서받고 깨끗하게 씻길 필요가 있습니다—이것이 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포인트입니다. 나의 죄는 씻기어 제거되어야 합니다. 물로 씻는 것에 대해 예레미야 33:8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따라서 우리 자신은 여전히 연속성을 보유한 채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람은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 죄책은 씻기어 깨끗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
하지만 용서와 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생각하고 평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서는 26절과 27절에서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위 구절들은 이런 뜻입니다. 확실히, 여기 기록된 돌의 마음(한글 개역개정에서는 '굳은 마음'으로 번역됨)은 영적 실재에 무감각하고 반응 없는 죽어 있는 마음—거듭남 전에 가졌던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도 여러 가지 것에 대하여 활기 있게 열정과 사랑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진리와 아름다움이나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의 길에 대해서는 돌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이 마음이 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거듭남 안에서 이 돌의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고기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고기의 마음이 한글 성경에 '부드러운 마음'으로 번역되어 있음) 이 고기의 마음은 생명 없는 돌과는 달리 부드럽고 살아 있고 반응하며 느끼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거듭남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죽어 있는, 돌과 같은 무덤덤함이 제거되고, 예수님의 가치를 느끼는(영적으로 느끼는) 마음으로 대치됩니다.
그 후 에스겔 선지자가 26절과 27절에서 말하길,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제 생각에 이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거듭남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살아 있고,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생명을 두시며, 이 새로운 생명—새 영—은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형상을 주고 성품을 부여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따뜻하고, 감동감화가 되고, 반응하고, 살아 있는 새로운 마음은 부드러운 진흙 덩어리와 같아서, 성령께서 이를 원하시는 대로 눌러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영적이고, 도덕적인 형상을 만드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우리의 심령과 마음은 그의 성품—그의 영—을 띠게 됩니다 (에베소서 4:23 참조).
그를 당신의 보물로 받아들이라
자 이제 돌아가서 두 주 동안 배운 것을 요약해 봅시다.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거듭남 안에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믿음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심으로써 초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십니다. 혹은, 다르게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며,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그 곳에는 우리의 죄에 대한 씻음이 있습니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것은 그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단단하고 반응 없는 마음을 부드럽고 예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치시키시며, 성령의 임재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환됩니다. (에스겔 36:27)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이 모든 것들을 체험합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 여러분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초대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죄를 용서해주시고, 마음을 바꾸어 주시는 여러분의 생명의 보물로 영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