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본문 말씀의 주된 포인트를 보기 위해 14절에서 시작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절로 돌아가서 이 말씀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다시 생각해 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따라서 말씀은 성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아들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이 용어가 14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한 하나님, 세 위격
무슬림은 아들이라는 이 단어에 걸려 넘어집니다. 다른 많은 이들도 그렇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우리가 아들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성관계를 맺어서 아들을 생산했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은 말씀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작이 없습니다. 그는 태초에 거기 계셨습니다. 그는 당신이 갈 수 있는 최대한 과거로 돌아가도 거기 계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거기 계셨습니다. 그리고 3절은 말씀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즉, 그는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도 피조물의 일부가 아닙니다. 여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아는 것이 있습니다. 1)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2) 아버지도 하나님이십니다. 3) 아들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4) 그는 창조되지 않았고 영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위격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말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를 마음에 간직하십시다. 아들과 아버지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두 위격이십니다. 그들은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은 각각 별개의 의식작용을 갖고 계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신 것을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14절이 말씀하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말씀, 아들이 하나님이신 것을 중단하지 않으시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두 주간 동안 우리가 살펴볼 것입니다: 어떻게 정말 그랬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며, 이것은 우리 각 자에게 개인적으로 무슨 의미를 갖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즉, 신성한 말씀, 신성한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심을 중단하지 않으시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습니까? 우리는 오늘 14절을 살펴 보면서 이에 대하여 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신적 말씀은 인간이 되실 때에도 신적 말씀이시길 멈추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14절에 나오는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거하셨다는 동사의 주어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방법은 하나님이신 말씀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사들이 마태복음 1:23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라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말씀이신 아들께서는 사람이 되셨을 때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
우리가 이렇게 믿는 두 번째 이유는 14절의 다음 구절입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누구의 영광이라구요? 말씀의 영광, 하나님이신 말씀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종류의 영광이라구요?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요한 사도가 성육신한 말씀의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역자주: 영어 성경 KJV 등의 표현에서는 "the glory as of the the only Son from the Father(아버지의 독생자로서의 영광)"이라고 되어 있으며, 저자는 여기서 "로서의"(as)의 뜻에 대하여 논합니다)을 이라고 말할 때, 이것이 아들처럼 흉내낸 영광이라는 의미입니까? 아들의 참 영광이란 뜻이 아니고, 마치 아들의 영광같이 크게 영광스러웠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저는 선물로 줄 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가 가장 첫 번째로 선택한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주고 싶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저는 당신의 진짜 첫 번째 선택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첫 번째 선택한 사람으로서 받는 것이지요" 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는 제가 "첫 번째로 선택한 사람으로서 이것을 당신에게 드립니다"라고 할 때, 여기서 "으로서"가 의미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으로서"가 의미하는 바는 당신은 참으로 나의 첫 번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말할 때, 이 말의 뜻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었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14절 초반부에서 요한은 단순하게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누구의 영광이라구요? 영원한 말씀, 아들의 영광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따라서 성육신의 놀라움을 감소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은 육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심을 그만 두시는 일 없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습니까?
15-18절은 말씀이 하나님이심을 중단하지 않으시면서 육신이 되셨다고 믿을 수 있는 더 많은 이유를 제공합니다. 주의 뜻이라면 다음 주에 이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이심을 중단하지 않으시면서 사람이 되신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봅시다. 왜 우리는 이 질문을 하여야 합니까? 첫째로는 성경 본문이 이에 대하여 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관계적 문화를 개간함
두 달 전에 제가 소위 관계적 문화를 우리 교회 안에서 증진시키는 데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면서 몇 개의 메시지를 전하였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제가 빌립보서 2:3-4절을 인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다시 말하면, 한 교회로서 우리가 우리 밖으로 나가서 다른 이들을 섬기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자라가도록 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종의 마음가짐, 관계적 마음가짐의 기초는 무엇인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다음 절은 설명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립보서 2:5-7). 다시 말하면, 겸손, 종됨, 사랑 그리고 저희 교회의 갱신된 관계적 문화의 기초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성육신과 적용
제가 이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관계적 문화에 대해 강조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신학을 파고들고 있구만"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장과 같은 신학은 매우 중요한 신학입니다. 이것은 요한의 복음과 정확히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의 영광을 알고 사랑을 위하여(13:34, 15:12) 그리스도에 의하여 변화되게 도와 줍니다. 즉, 우리 교회의 관계성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를 더 사랑하고, 더 도와 주고, 더 종과 같이 섬기게 하고, 덜 교만하게 하고, 덜 이기적이게 하고, 덜 내향적이 되게 하고, 더 배려하고 보살피게 합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볼 때까지 14절에서 떠나지 맙시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그 물음 위에 있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항상 이 위대한 신학이 우리의 개인적인 그리고 관계적인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지 지켜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따라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14절은 말씀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은 죄 안에 있는 우리를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대신에 이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그의 진실함, 신실함을 추호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매우, 매우 큽니다. 그래서 여기에 충만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입니다. 여기서 충만이라는 단어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은 하나님의 진리를 구부러뜨림 없이 우리 죄인을 향하여 은혜로움으로 충만합니다.
은혜의 충만
이것은 참으로 복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자와 처벌을 집행하는 자로서 육신을 입고 등장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그 앞에 죄인으로 서게 될 것이며 영원한 벌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신 말씀, 아들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신적 영광을 계시하기 위하여 육신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로우시기 위하여 육신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이 은혜로우심이 하나님의 진실되심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말씀은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적당주의적인 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원칙이 확고하지 않은, 감상적인 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의롭고, 하나님의 명예를 드높이고, 댓가를 지불하는, 그러한 은혜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으로 바로 이끌어 가는 은혜입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육신이 되신 이유입니다. 그는 죽으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셔야 했습니다. 그는 우리 대신에 신인으로서 죽으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셔야 했습니다(히브리서 2:14-15).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능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은혜의 충만한 것이 가장 밝게 비치는 곳입니다. 은혜는 거기서 행해졌고 거기서 값을 치르고 산 것입니다.
... 그리고 진리
그리고 이것이 죽음을 통하여 일어난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우시고 자신에게 참되십시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께서 오실 때,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진실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벌을 받으셨고 우리가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구절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은혜의 충만과 진리의 충만으로.하나님의 영광이 역사상 그 어느 순간보다 더 크게 계시되어 밝게 빛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아름다움을 보는 것
여기서 여러분이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글쎄, 나는 그를 보기 위하여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영광은 내가 볼 수 없다. 너희들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에 대하여 원하는 대로 이것 저것 말하겠지만 그는 여기에 볼 수 있게 계시지 않는다." 조심하십시오. 14절에 나오는 이 영광이 기껏해야 외적으로 드러나는 밝음이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는 뛰어나거나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53:2).
그리고 14절의 이 영광이 단지 기적들의 나타남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음에도 아름다운 것이나 영광스러운 것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원했습니다(요 11:45-48)
아닙니다, 그의 초림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된 "영광", 말씀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주로 영적인 영광, 영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이는 여러분의 육체의 눈을 가지고 보는 무언가가 아니며,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업니다(에베소서 1:18). 우리는 그가 말하신 것, 행하신 것, 사랑하신 것, 죽으신 것 등을 보면서, 스스로 입증하는 신적인 영광 혹은 아름다움을 봅니다. 이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비할 데 없는 은혜와 진리의 혼재
바울은 고린도후서 4:4에서 이와 같이 표현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요한복음 1:14이 "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지상에 거하시던 예수님을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으며,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우리들처럼 지상에 거하시던 예수님을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의 영광과 고린도후서 4:4의 영광은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영적으로 보게 되는 영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육체의 눈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0:29에서 말씀하시길,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여러분은 요한의 복음서와 성경 다른 곳들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여러부이 이 영감된 책에서 그의 말씀과 그의 행하신 것을 읽음으로써 예수님을 만날 때, 그의 영광은 이를 통해 빛납니다. 이는 은혜와 진리의 비할 데 없는 혼재의 자기 입증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복음에 의하여 거듭난
12-13절이 거듭나는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고, 14절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는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2-14절을 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4절을 기억하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새로운 영적 생명이 주어질 때, 새 빛이 발생합니다. 이 빛은 물리적 빛이 아닙니다. 이것은 14절에 언급되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영적으로 빛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새로운 영적 생명이 우리에게 생겨납니까? 13절은 말씀하기를 이는 우리가 사람으로부터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날 때 이런 일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거듭남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나오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입니다(요한복음 1:12).
복음에 의해서—예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와 말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영적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베드로전서 1:23-25). 그리고 이 새로운 영적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봅니다(요한복음 1:4). 이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는 요한복음 8:12이 이를 "생명의 빛"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될 때, 여러분은 영적인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 영광을 보라
다르게 표현하자면, 12절에 의하면, 이 새 생명과 새 시각은 빛을 믿으며 그 빛을 진리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영접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과 빛과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는 권세를 얻는다고 12절은 말씀합니다. 즉, 이 생명과 빛과 믿음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 앞에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을 제시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여전히 하나님으로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의 영광을 보십시오. 아버직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를 보십시오. 그분의 인격과 그분이 삶 속에서 영광을 보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