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적 은혜에 의해 붙들어 주심—영원히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말하는 바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 하는 이 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37 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38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3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4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난 125년간이나 우리 교회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붙들어 주시는 은혜란 무엇입니까? 네 줄의 시로 한번 표현해 보겠습니다.
평탄하지 않은 일을 다 막아 주시는 은혜가 아니며,
모든 고난을 면하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명하시고,
그리고 나서, 어둠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은혜이다.
제가 위와 같이 표현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평탄하지 않은 일들이 생기지 않게 해 주고, 모든 고난을 막아 주고, 우리의 고통을 명하지 않는 은혜를 기념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거짓된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도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 . . 거의 치명적인 교통사고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에 닥치는 고통을 아예 막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성경 말씀을 보아도 그렇고 우리의 경험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고통을 적절히 배치하시고 필요한 만큼 덜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붙들어 주십니다. 예를 들면, 어제 침례교 총회장 밥 리커는 하나님의 붙들어 주시는 은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소중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불과 10년 전에 그의 딸은 심한 교통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녀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오늘날 살아 있습니다. 바로 뒤 차안에 우연히 주머니 속에 기도삽관기구를 가지고 있던 의사가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의사가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는 파랗게 숨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튜브를 그녀의 목으로 삽입하여 기도를 확보하고 그녀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몇 년 후 그녀의 결혼식에서 밥은 그의 딸에게 말했습니다: 얼굴에 생긴 상처들은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나게 해 주는 기념비적인 것이라고.
밥 리커는 순진해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바로 뒤 차에 의사가 타고 있도록 섭리하실 수 있고 그 의사가 그의 주머니 속에 호흡 보조 도구를 가지고 있고 나아가 이를 사용하여 생명을 구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섭리하실 수 있으시다면, 그렇다면 이 하나님께서는 우선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밥은 그의 말씀 앞 부분에서 에베소서 1:11을 인용했었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그는 "이 구절에 나오는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차가 다니는 길이나 비행기나 화살이나 총알 등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저의 시 "붙들어 주시는 은혜란 무엇인가"의 창작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평탄하지 않은 일을 다 막아 주시는 은혜가 아니며,
모든 고난을 면하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명하시고,
그리고 나서, 어둠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은혜이다.
. . . 차가 고장날 때
두 주 전 토요일, 제 아내와 아이들은 차를 타고 조지아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차가 인적 없는 길에서 고장나 멈추었습니다. 육십대 중반의 농부가 차를 멈추더니 도움을 제공하였습니다. 제 아내 노엘은 모텔이 필요할 것 같고 월요일 아침에 정비소에서 차를 수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농부는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묵으시겠어요?"라고 하였고 노엘은 폐를 끼칠까 걱정되어 주저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길,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아침에 교회에 갈 수 있을까요? 침례교회라도 좋다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농부와 함께 묵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는 항공 수리 기술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동차의 문제를 진단하고 월요일 아침에 타운까지 가서 새 자동차 부품을 사서 돌아와서 그것을 무료로 장착해 주어 가족들을 잘 보내어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제 아들 바나바는 차에서 낚시대를 꺼내서 19인치 물고기를 잡으며 놀 수 있었습니다—마치 맛있는 음식에 고명을 얹은 격이지요.
농부로 하여금 노엘을 돕게 하시고, 그가 그리스도인(심지어 침례교인!)이고, 그와 그의 아내에게 우리 가족이 묵을 수 있는 빈 방이 있고, 그가 기술자이고, 그가 고장난 자동차 부품을 월요일 아침 발견하고,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고, 그가 물고기가 있는 연못을 소유하고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아예 자동차가 고장나지 않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 . .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 때
그러나 이 타락한 무익한 세상 안에서 그런 것은 붙들어 주시는 은혜의 방식이 아닙니다.
평탄하지 않은 일을 다 막아 주시는 은혜가 아니며,
모든 고난을 면하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명하시고,
그리고 나서, 어둠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은혜이다.
우리 교회에는 믿음을 극한까지 시험하는 깊은 물을 통과하고 있는 중인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최근에 그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대신에 치유가 없는 것을 인내하는 은혜를 주셨다면 견디기 더 쉬울 것입니다." 제가 그에게 말해 준 것들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고린도후서 12:9-10 에서 하신 일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이 육체 안에 가시를 가지고 있을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기도하여도 이를 제거하여 주시지 않으십니다. 바울의 겸손을 위해서입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붙들어 주는]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에 대해 바울은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평탄하지 않은 일을 다 막아 주시는 은혜가 아니며,
모든 고난을 면하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명하시고,
그리고 나서, 어둠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은혜이다.
. . . 교회가 불타 무너질 때
베들레헴 침례교회가 설립된지 14년 되었을 당시에, 교회는 12번 애비뉴와 6번 스트리트가 만나는 코너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때, 1885년 3월 16일 월요일 교회에 화재가 났고 교회 건물은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 가운데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지붕이 전부 붕괴되었으나 소방관들이 서 있었던 부분만 지붕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7주 이내에 교회는 제2 회중 교회의 건물을 구입하였으며, 거기서 우리는 106년 동안 예배를 드렸습니다.
약해진 지붕의 일부분을 지탱하여 주심으로 소방관들이 죽지 않게 하실 수 있으셨고, 7주 안에 새롭고 더 나은 건물을 살 수 있게 일들을 섭리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화재를 아예 막아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우리는 붙들어 주시는 은혜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명하시고,
그리고 나서, 어둠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재난을 항상 면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32장의 오늘 본문은 이러한 붙드시는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 베들레헴 침례교회가 오늘날 까지 이 도시에서 125년 간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핵심 비결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어둠 속에 그리고 고난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명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3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말하는 바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 하는 이 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구절이 바로 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재난을 배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에게 할당되는 재난을 배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 대한 최종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37절입니다. "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고난과 고통을 명하셨다고 선언하십니다. "내가 쫓아 보내었다." 그리고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하나님은 직접 그들을 자신에게로 모아들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권적 은혜는 결국 재난을 이기고 승리할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은혜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까? 황폐하게 하는 먼 나라로 추방당하게 하시고 거기서 많은 자들이 그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잃어버려지게 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교회, 그리스도의 신부, 참된 이스라엘, 여러분과 저, 즉, 그의 아들과의 사귐 안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왜 베들레헴 침례교회는 125년간 지탱되었습니까? 더 긴급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은혜가 우리 베들레헴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장래의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승리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여러분은 은혜가 여러분을 끝까지 붙들어 주셔서 천국에 안전하게 들어가기까지 여러분이 믿음과 거룩 가운데 살게 하실 것을 확신하십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나머지 부분이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위해 베푸시는 붙드시는 은혜는 주권적 은혜입니다. 즉, 붙드시는 은혜는 전능한 은혜입니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믿음과 거룩을 보존하여 우리를 천국 본향으로 데려다 주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장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여러분과 저 스스로는 완전히 변덕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끝까지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능력에 남겨진다면, 우리는 믿음에 대해 파선할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수 세기 동안 다음과 같이 기도한 이유입니다.
오, 나는 주의 은혜에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가 (이하, '복의 근원 강림하사' 라는 제목의 찬송가 가사의 영문을 번역한 것임)
매일그 은혜가 저를 묶어 주고 계십니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의 방황하는 마음을 주께 매소서,
방황하기 쉬운 나의 영혼,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떠나기 쉬우니,
여기 저의 마음을 취하사 매소서,
당신의 심판을 위하여 이를 매고 천국인을 치소서.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걸까요? 여러분의 장래를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해야 할까요? 이는 성경적 기도인가요? 당신의 선함을 족쇄 혹은 사슬 같이 만드사 저의 방황하는 마음을 당신께 매소서. 천국의 심판정을 위하여 저의 마음을 끊을 수 없는 결합으로 봉인하소서. 다시 말하면, 저를 지키소서! 저를 보존하소서! 제 마음에서 슬며시 고개를 드는 모든 반역을 무찌르소서! 모든 자질구레한 의심을 넘어서게 하소서! 모든 멸망케 하는 유혹에서 건지소서! 모든 치명적인 유혹을 무력화시키소서! 모든 마귀적 기만이 드러나게 하소서! 모든 거만한 논쟁을 허무소서! 저를 빚으소서! 저를 이끄소서! 저를 붙들어 주소서! 저를 정복하소서! 예수님께서 오시거나 제 영혼을 부르실 때까지, 제가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을 경외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있는 모든 것을 해 주소서. 우리는 이와 같이 기도하고 노래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기도하여야만 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답은 예입니다. 즉,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한 유형의 찬송이나 기도는 주권적인 붙드시는 은혜에 대한 새 언약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읽으십시다. 명심하십시다. 오늘 본문은 구약에 나오는 새 언약의 약속에 관한 말씀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인쳤다고 말씀하신 새 언약의 약속에 관한 것입니다. 단지 유대인만을 위한 언약이 아니며,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님께 연합되어 표면적 유대인이 아닌 이면적 유대인, 참된 유대인이 된 자들을 위한 언약입니다 (갈라디아서 3:7, 16). 예레미야서 32:38-41은 말씀합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3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주권적인 붙드시는 은혜의 네 가지 약속
주권적인 붙드시는 은혜의 네 가지 약속을 주목하십시오.
1.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38절입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그의 백성들에 대한 모든 약속은 이 구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즉, 나는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 나의 모든 지혜, 모든 능력, 모든 사랑—을 사용하여 너희들을 나의 백성으로 남아 있게 할 것이다. 하나님으로서 나의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해 사용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셔서 우리가 그를 사랑하고 경외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39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 (40절)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그를 경외하는지 그냥 지켜보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권적이고도 지극히 자비롭게 우리가 가져야만 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경외함을 주셔서 우리를 천국 본향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권적인 붙드시는 은혜입니다. (신명기 30:6, 에스겔 11:19-20; 36:27을 보십시오.)
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도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40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즉,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매우 강력하여서 우리가 그를 떠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에 있어서 새로운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우리가 충족하여야 할 조건을 충족시키십니다. 우리는 그를 경외하여야 하고 사랑하여야 하고 그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씀하시길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그렇게 하겠다. 즉,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떠나지 않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역사할 것이다. 이것이 주권적인, 붙드시는 은혜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강렬함으로 이를 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를 상상가능한 가장 큰 강렬함(greatest intensity)으로 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를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하십니다. 하나는 41절 앞 부분에서 표현하시고, 나머지 하나는 41절 말미에서 표현하십니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첫 째, 이 주권적인 붙드시는 은혜를 기쁨으로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그리고 41절 후반부에서 이 주권적, 붙드시는 은혜를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발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을 복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갈망은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붙들어 주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기뻐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어떤 과장이나 수사적 미사여구 없이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온 마음과 온 정성을 쏟으시는 갈망보다 더 강력한 갈망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 땅 위의 모든 인간의 마음과 영혼 안에 있는 갈망들 예를 들면 음식과 섹스와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의미와 친구와 안전에 대한 모든 갈망을 다 취하여 그 모든 갈망을 즉 60억 명의 그 모든 갈망을 어떤 용기에 담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것을 하나님의 갈망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선을 행하시려는 하나님의 갈망 즉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라는 말씀에 표현된 그 하나님의 갈망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막과 바늘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정성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정성은 유한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보다 더 강력한 세기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권적 은혜로 여러분을 붙들어 주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의 세기입니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여러분 중에는 오늘 아침 이 은혜의 달콤함을 처음으로 맛보고 계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성령의 역사에 항복하시고 주권적인, 붙들어 주시는 달콤한 은혜에 정복당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수십 년 동안 이 달콤한 확신 가운데 살아 왔으며 오늘 아침 이 영광스러운 현실을 저와 같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모두 저와 함께 교회로서 125년 동안 우리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부르며 높입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지켜 굳게 하십시다.
평탄하지 않은 일을 다 막아 주시는 은혜가 아니며,
모든 고난을 면하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명하시고,
그리고 나서, 어둠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