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으뜸되심에 대한 열정, 파트 1
열정 컨퍼런스
텍사스 오스틴
(이 글은 존 파이퍼(John Piper) 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영적 각성 모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열정 컨퍼런스(Passion Conference)의 97년 집회에서 나눈 말씀의 오디오 레코딩을 받아 적은 원고이다.)
열정 '97에 강사로 참석하게 된 이유들
이유 #1
저는 제가 여기 있는 이유 몇 가지를 얘기하면서 시작하기 원합니 다. 16-17년 동안 목회자로서 지역 교회 안에 있었던 큰 유익 중 하나는 지난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저희 교회의 비전과 목회 자의 비전이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1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전 선언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의 기쁨을 위하여 만물 안의 하나님의 으뜸되심에 대한 열정을 퍼뜨리기 위하여 존재한다.
이는 우리 베들레헴 침례교회의 미션일 뿐만 아니라 제 일생의 미션이라고 저는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열정 컨퍼런스에 초대된 후 이 컨퍼런스에 관하여 읽어 보고, 여기서 "열정"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나아가 이사야 26:8 말씀—"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의 배후에 있는 진리를 보았을 때, 저는 이 모임의 강사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분 모두와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의 기쁨을 위하여 만물 안의 하나님의 으뜸되심에 대한 열정을 퍼뜨리기 원합니다. 이것이 제가 여기 강사로 참석한 이유들 중 가장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이유 #2
두 번째 이유는 제가 여 러분의 기쁨에 불을 붙이기 위한 작은 성냥이 되기 원해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곳을 떠날 때, 하나님 안에서 전율과 행복을 갖고 떠나기를 원합니다.
이유 #3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가 같은 이유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두가지 이유는 하나입니다. 즉, 하나님의 으뜸되심을 향 한 열정을 전파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거의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여러 분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두고 두고 반복할 문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 안에서 가 장 만족할 때, 여러분 안에서 가장 영광 받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나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표현하는 것 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더 많은 만족을 찾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더 깊이 마 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잔치상에서 더욱 많이 먹을수록, 하나님의 가치는 더욱 더 찬양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전적 인 충족성은 더욱 더 확대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은 이를 통해 영광받으십니다. 우리의 만족과 하나님의 영광 받으심 사이에 어떠한 경쟁도 없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복음입니다. 1968년, 1969년, 그리고 1970년 에 하나님께서 저의 삶에 역사하셨을 때, 저는 이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받으시려는 열정과 여러분의 만족하기 원하는 열정 사이에는 경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에 온 세 번째 이유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나는 빙하에 불을 붙이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나는 마음 속에 한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24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2에 의하면, 말세를 내다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람이 식어지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사랑이 식어버리는 것이 죽을 정도로 두렵습니다. 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어느날 말라버린다든지 꽁꽁 얼어버린다는 것은 그 생각조차 끔찍하고 혐오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전 세계에 걸쳐 빙하처럼 다가오고 있습니다. 말세에 대한 나의 예상 중 일부는 불법이 성하여지고 많은 사람 의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황량한 말세의 묘사가 되겠죠.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을 계속 읽어나 가면, 아래 13절에 말씀하기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누군가는 견딜 것입니다. 그 다음 절에 말씀하기를, “이 천국 복음--바꿔 말해서, 왕되신 예수님의 으뜸되심에 대한 열정을 전파하는 그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제 12절을 14절과 나란히 놓고 긴장감이 느껴지는지 보십시오. “불법이 성행할 것이고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이 천국 복음—예수님의 주권적 통치의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고,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오리라.”
이 두 구절 사이에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고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려는 사람들은 차가운 사람들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사람들은 차가운 사람들이 아닙니 다. 어떻게 그걸 아냐구요? 몇 구절만 앞으로 돌아가 보면, 9절에, 굉장히 다른 예언적인 말씀에서 당신은 무언가를 발견하게 됩 니다. 이르기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만약 우리가 선교하는 가운데 권력자들에게 넘겨진다면, 만약 우리가 죽 임을 당한다면, 만약 우리가 우리가 가는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저는 한가지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차가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되신 예수님의 굉장히 뜨거운 예배자들이 그것을 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 9절 내지 1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종말이 가까움에 따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사람들 이 있을 것이고 반면에 굉장히 뜨거워서 예수님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내어놓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베들 레헴 침례교회에서의 목회를 하는 것이나 여기에 와서 설교하는 것은 빙하에 불을 붙이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설교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한 6살 혹은 7살 정도 된 어린 소녀가 예배 후에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어린이들에게 제 설교를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권장합니다.) 그 소녀는 “이게 제가 본 거예요” 라고 하면서,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라고 쓰인 거대 한 빙하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그림에서는 어떤 한 마른 사람이 횃불을 들고 있었고 빙하의 꼭대기엔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위에는 햇볕이 한가득 그 구멍을 통해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의 종말론은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당신의 캠퍼스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또는 오스틴(Austin),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 등 당신의 출신지가 어디든간에 그 곳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하다면: 빙하는 움직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차가워지고 있지만--말라버리고, 꽁꽁 얼어 버리고 있습니다만-- 성경 어디에도 종말에 대해서 말할 때, “베들레헴 침례교회”, 혹은 “미네아폴리스”, 또는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이 그 빙하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혀!! 만약 빙하에 불을 붙이는 하나님을 위한 굉장히 뜨 거운 횃불을 든 충분한 사람들이 있다면, 커다란 구멍이 당신의 학교와 교회와 심지어는 당신의 도시 위에 열릴 수 있습니다. 그것 이 제가 여기에 온 이유입니다. 저는 저의 횃불을 들어올리고 싶습니다.
100여년 전에 영국의 스펄전(Spurgeon) 목사 는 메트로폴리탄 테버나클(Metropolitan Tabernacle)에서 설교하면서, “사람들은 내가 불을 붙이는 것을 보러 옵니다” 라 고 되풀이하여 말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꺼질 것 같은 그들의 작은 횃불을 들고 와서 나의 횃불에 가져다 대고는 나가서 또 한 주 동안 예수님을 위해서 태웁니다. 당신이 오늘 아침 깜박거리는 횃불을 여기로 들고 와서 내 불에 가져다 댄다면 나는 너무도 감 격할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메시지의 목적: 기초 형성하기
저의 과업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에 대해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과 내일 아침, 두번에 걸쳐 말씀을 나누되, 오늘 아침은 기초에 대해 전하고 내일 아침은 적용에 대해 전하고자 합니다.
토대는 이것입니다: 만물에 있어서 의 하나님의 으뜸되심을 위한 당신의 열정은 만물에 있어서 자신의 으뜸되심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에 바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당신 의 하나님 중심성은 —이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중심성에 근거하여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시길 원한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삶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보배가 되기를 원한다면—우리가 여기서 노래했던 것처럼—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더 귀 중하게 여기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보배가 하나님 자신인 것과 하나님은 자신을 그 무엇보다도 더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고 믿어 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기쁨,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빼앗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초입니다. 이것이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이러한 추구가 필연적으로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시는 것에 함축되어 있음을 이 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영광을 열망하십니다.
짧은 이야기로 시작하지요. 8-9년 전에 모교인 휘 튼 대학(Wheaton college)에서 강연했습니다. 그 크고, 샹들리에로 장식된, 푸른색의 아름다운 예배당에 선 것은 처음이었습 니다. 제가 “하나님의 제일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영원히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했 을 때, 발코니에 앉아 있던 제 친구들 모두 한결같이, “이런, 졸업20년 후에 모교에 와서 학생들에게 하는 첫 강연에 이런 실수 를 하다니. 시작하자마자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을 잘못 인용해서 ‘사람의 제일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이라고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제일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 이라고 해버렸군” 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안심할 수 있게, 저는 계속해서, ”말실수를 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실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제일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영원히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전도자의 가 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제 아버지, 빌 파이퍼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고린도전서 10:31을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지만 저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의 뿌리 혹은 근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신다는 것이라는 말도 결코 들어보지 못했었습니다.
저는 한번도 집에 가져온 주일학 교 주보에서 “하나님은 당신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하찮은 당신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은 그가 당신을 사 랑하길 바라는 것이다” 등의 글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한번도 이런 글을 주일학교 주보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베들레 헴 침례교회에서 교육과정을 정비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가정이나 교회에서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이 너무도 기뻐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지, 하나님중심적인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기뻐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자기존 중심이 최고의 가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중심적인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없이 당신이 어차피 하려 했던 것들을 지지해 주는 정도로만 기독교인이 되기가 쉽습니다. 누가 기독교인이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하나님중심적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면함으로써 이 에 대한 사랑을 갖게 되는 근본적 변화 없이, 당신이 어차피 사랑했을 것들을 사랑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닙니 다. 자신의 영광의 현현에 열정을 갖고 계신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저 당신의 자아 발전 과 자아 찬양의 도구에 불과하다면, 당신이 참으로 회심하였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이는 이곳 오스틴(Austin)의 열정(passion) ’97 모임에서 있어야 할 중요한 현실 점검 입니다. 거의 아무도 하나님이 나를 그의 영광을 위하여 택하셨다는 성경 속에서 찾은 이 사실을 나에게 언급하거나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1976년 베델(Bethel) 대학에서 소위 “계절학기 ”에서 에베소서 1장에 대한 수업을 가르칠 때, 에베소서의 첫 열네 절들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면서 제 세상이 다시 활짝 열렸던 기 억이 납니다. 세번에 걸쳐--6절, 12절, 그리고 14절에서—말씀하기를, 그가 우리를 태초에 그 안에 택하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미리 정하신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택하셨습니다. 왜 ? 그의 영광과 은혜가 찬미되고 확대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구원 받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선택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거듭남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의 칭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서입니다. 당신의 성화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당신의 영화는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흡수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이사야서 43:6-7: “내 아들 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 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 하셨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편 106:7-8
다시 말해서, 홍해를 가르시고 그의 거역하는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그의 권능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저 멀리 떨어진 여리고까지 알려져서 한 기생을 살리고, 그래서 그들이 그곳에 도착해서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그녀가 새로 거듭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 우리가 너희의 이름과 명성을 들었슴이니라” 고 했기 때문입니다. 한 여성과 그녀의 가족이 하나님중심적인 하나님을 믿고 그 파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 의 영광을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여러번 반복해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셨 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기록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 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 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그리고 나서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셔서 바벨론으로 보내시고, 70년 후에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는 그의 언약된 신부와 이별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다시 데리고 오리라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동기였을까요?
이사야서 48장을 들어 보십시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 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풀무 불로 시련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중심적인 동기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 와서 죽으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요한복음 3:16을 인용했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영광스러운 진실입니다. 오늘 아침 말씀이 끝나기 전에, 혹은 적어도 내일 아 침에는, 여러분은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강조점과 여러분이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강조점 사이에 어떠한 부조화도 없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왜 예수님이 오셨을까요? 로마서 15:8절에 따르면, 그분은 이러 한 이유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 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입으 시고 죽으신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그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것이 그가 이 땅에 오신 주된 이유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그의 영광 은 긍휼이 흘러넘침으로 그 정점에 달합니다.
로마서 3장에서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 내사.” 이것이 바로 그가 죽으신 이유입니다. 그는 다윗의 간음과 살인 같은 죄를 간과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변호하고 옹호하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간과하시고 다윗이 여전히 왕으로 지낼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 당신을 혼란스럽게 한 적이 있습니까? 글쎄요,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하신다면, 하나님은 의롭지 않은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은 바울을 그의 존재 가장 깊은 곳까지 괴롭혔습니다. 다윗 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나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단순히 잊고 간과해주신 수많은 성도들 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의로우신 분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 게 공정하신 분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 예를 들어, 어느 판사가 그랬다면, 즉 아동 학대자, 강간범, 혹은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면, 그는 당장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매일 그렇게 하십니다, 주는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십자가가 이 거대한 신학적 문제 의 해답입니다. 즉,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인 동시에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있어 서 하나님을 옹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은 웅장하고 영광스럽게 하나님중심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광받 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왜 예수님이 다시 오실까요? 여러분, 예수님은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십니다. 왜 그가 다시 오시는지 그리고 그가 올 때에 당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이 준비되어 그렇게 할 수 있도록요.
데살로니가후서 1:9: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여기서 두 가지가 보이십니까? 그는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받고 더 크게 보이기 위해 그리고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려고 오십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지금 시작하지 못한다면 그분이 오실 때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컨퍼런스는 당신의 뼛속까지 불을 붙이고 당신의 지성과 감성에 불을 붙여서 당신이 왕되신 예수님을 만날 준 비가 되게 하고, 그가 당신을 지으신 목적, 즉 그에게 감탄하고 그를 확대하는 일을 영원토록 계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합 니다.
우리는 만원경같이 하나님을 확대해야만 합니다.
그분을 확대하십시요, 그러나 현미경처럼 하지 마십시오 . 여러분은 두 가지 종류의 확대의 차이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만원경의 확대고 다른 하나는 현미경의 확대입니다. 하나님을 현미경 확대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현미경처럼 하나님을 확대한다는 것은 아주 조그만 어떤 것을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한 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신성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원경 확대는 렌즈를 상상할 수 없는 거 대한 창공을 향해 놓고 실제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단순히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만원경의 용도 입니다.
반짝 반 짝 작은 별—밤 하늘을 올려다 보면 그것들은 작은 점같이 보입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그것들은 큽니 다. 사실은 굉장히 크죠. 그리고 그것들은 뜨겁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만원경을 발명하여 그들의 눈으로 들여다 보고, “이것 은 지구보다 크구나, 몇만 배 이상이나 지구보다 크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그런 것을 전혀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 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습니다. 당신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당신의 학교 교정에 만원경 확대처럼 확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은 아주 큰 부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는 내일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중심적이라면, 하 나님은 어떻게 사랑하는 분일 수 있나요?
제가 말씀을 마치기 전에 집고 넘어갈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문제가 지금 제기되기 시작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중심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중심성은 나의 하나님중심성의 근거이자 뿌리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20년 동안 사람들에게 말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이런 문 제가 제기됩니다: “이건 사랑같이 들리지 않아. 왜냐하면 성경은 고린도전서 13:5절에서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거든. 그런데 지난 15분 동안 당신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쓰신다고 말하고 있으니 ,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거나 당신이 거짓말쟁이요.” 자,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찬양을 구하면서 동시에 사 랑하는 분일 수 있을까에 대해 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C.S. 루이스의 도움
저는 (문 제의) 열쇠를 C.S. 루이스에게서 찾았습니다. 누구든지 제 책 Desiring God(역주: 한국에는 '하나님을 기뻐하라'라는 제목으 로 생명의 말씀사에서 발행됨)을 읽었다면 다음의 인용구를 기억할 겁니다. 루이스는 20대 후반까지 이교도였고 하나님의 허영심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시편을 읽을 때마다,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을 찬양하라”라는 글을 매번 봤고—그는 시편에 영감을 준 기독교 의 교리가 무엇이지 알았습니다—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나를 찬양하라, 나를 찬양하라”라고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늙은 여인이 칭 찬을 받고 싶어하는 것같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책 ‘시편 묵상’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하나님께서 C.S. 루이스의 삶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다음의 글을 적었습니다:
하나님의, 또는 다른 것에 대한 찬양에 대한 가장 명백한 사실을 이상하게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칭찬, 인정,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생각했었다. 한번도, 찬양으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넘치는 기쁨—가끔 수줍음으로 억제되지 않는다면—에 대해서 제대로 인지한 적 이 없다. 온세상은 사실 찬양의 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 연인들은 그들의 애인을 찬양하고, 독자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 산책하는 사람은 시골을, 플레이어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을, 그리고, 날씨, 와인, 음식, 연기자, 말, 대학, 나라, 역 사적 인물, 어린이들, 꽃, 산, 희귀한 우표, 희귀한 딱정벌래, 심지어는 가끔씩, 정치인이나 학자에 대한 찬양까지. 우리는 소중 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전체적이고 보다 일반 적인 어려움은 최고로 소중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어서는 어리석게도 그 기쁨을 주는 것을 부인하는 데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음의 핵심 문장이 나옵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우리가 즐기는 것 을 찬양하는 데서 큰 기쁨을 느낀다. 왜냐하면 기쁨은 표현되고 나서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연인들이 서로에게 그들이 얼마나 아름 다운지를 계속 말하는 것은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다. 기쁨은 표현되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제 하 나님은 어떻게 그가 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하시면서 동시에 자기를 높이실 수 있는지 이해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
만약,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주셔야만 할까 요? 당신에게 최상의 것을 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 우주에서 최상의 것, 최고의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만약에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건강, 최고의 직업, 최고의 배우자, 최고의 컴퓨터, 최고의 휴가, 최고의 성공을 주지시만 그 자신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가 당신에게 하나님 자신만을 주시고 다른 모든 것은 주시지 않는다 해도, 그는 당신 을 무한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나의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가져야 합니다. 자, C.S.루 이스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 자신을 당신으로 하여금 영원히 즐거워 하도록 주신다면, 그 기쁨은 찬양으로 표현되기 전에는 완성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완전히 사랑하시기 위해서는 그는 당신의 기쁨이 찬양을 통해서 완성되는지 안 되는지에 무관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찬양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다 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의 실체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실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최상의 것을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최상의 것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 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기쁨 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 기쁨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표현되지 않는 한, 그 기쁨은 한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 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기쁨을 어떤 면에서라도 한정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나를 찬양하라. 네가 하는 모든 것에서 나를 찬양하라. 네가 하는 모든 것에서 나를 경배하라. 네가 하는 모든 것에서 나의 으뜸됨을 향한 열정을 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받기 원하신는 열정과 당신의 기뻐하고 만족되기 위한 열정은 서로 불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둘 은 같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자, 이것이 오늘 아 침 말씀의 끝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내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것을 위하 여 기도할 수 있고, 바라건대, 내일 다시 와서 내가 이 말씀을 끝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것 이 사실이라면—당신이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면—그러므로, 당신의 그 안에서의 만족과 그 의 당신 안에서의 영광받음 사이에 긴장과 모순됨이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삶의 사명은 여러분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것을 저는 기독교 희락주의라고 부릅니다. 내일은 그렇게 하는 방법과, 왜 그것이 여러분의 관계, 여러분의 학교, 여러분의 찬양, 그리고 여러분의 영원을 변화시키는지에 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