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가 아니면 자신을 위하시는가
수년 전에 저는 애너하임의 빌리 그레엄 전도단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밤 그곳에는 약 50,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좌측 옥외 관람석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안마당을 휘감듯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위대하신 주님"이라는 찬송을 부를 때, 저는 몇 개 음을 따라 부르다가 그만 밀려 오는 감동에 더 이상 찬송을 부르기가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만 개의 목소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마음에 큰 감동이 밀려와서 저는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50,000명의 피조물이 함께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는 것보다 더 올바르고, 더 아름답고, 더 심오하게 즐거운 것을 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제가 그 날 천국의 광경을 작고 미약하게나마 목격한 것이라고 참으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5:11-13은 천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천국의 광경은 셀 수 없는 피조물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온 힘을 다하여 찬양하는 광경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영광을 맛본 자들은 세상에 팔려서 그 영광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찬양을 추구하십니다.
어린 양은 존귀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존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와 성자를 찬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들을 찬양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진리에 대하여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 주 동안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길, 하나님께서는 찬양받으시기 합당하게 행하시는 데 그친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찬양받는 것을 그의 목적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의 능력과 의와 자비에 대한 피조물의 찬양을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주도권을 쥐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시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은 영광을 받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에 의하여 동기부여되어 행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이사야 48:11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신적 행하심에 있어 깃발이 되는 구절입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13:11은 이것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에 있어, 하나님은 그의 이름의 영광이 찬송받으시려는 목적으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혹시 구약에서만 이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에베소서 1장을 세심히 보겠습니다. 이 책은 얼마나 거대한 책인가요!—겨우 열 개의 절 남짓한 짧은 글이 그 담고 있는 내용의 높이에 있어서는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6절, 12절, 그리고 14절에 세 번 반복되어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목적에 대하여 바울이 생각하는 바를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리고 12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최종적으로 14절입니다: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먼 과거로는 예정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과거의 영원한 결정으로부터, 장래로는 장차 올 시대에서 영화된 우리가 우리의 유업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목표는 그의 영광 특히 그의 은혜의 영광이 찬송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받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찬송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공통되는 진리들이며, 우리는 이 진리들을 기쁘게 확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단지 그의 행하심의 결과일 뿐 아니라 그의 행하심의 목적이요 목표라는 진리를 거의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심에 있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통치하십니다. 즉 숭앙받고 놀랍게 여김을 받고 높임받고 찬양받으시려는 분명한 목적으로 통치하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10에는 그리스도께서 이 시대의 마지막에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진리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다는 것이 저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찬양을 구하신다는 것은 그다지 바른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높이는 자마다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마다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확한 목적은 사람의 눈에 하나님 자신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 안에서 제가 목표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수고는 사랑의 표현이라서 이는 완전히 선하고 어떤 종류의 잘못도 없고 사람의 죄악된 자기 찬양과는 완전히 다른 본질을 갖는 것임을 가능한 한 명확히 보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 이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그 위대한 목적에 동참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중심되심'에 걸려 넘어지는 두 가지 방법
제 생각으로는, 자신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에서 거룩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면서 걸려 넘어지게 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런 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는 것이 그 한 이유이고, 성경이 어떤 사람도 자신의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이시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일상 경험 때문에 그리고 성경 구절 때문에 불쾌감을 갖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기술이나 힘이나 외모에 마음이 홀딱 빠져 있는 자아도취적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전문 지식을 과시하려는 사람 혹은 자신의 최근 저술이나 강의를 자랑삼아 인용하는 학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효과적으로 돈을 투자하여 큰 수익을 남겼는지 자랑삼아 거듭거듭 얘기하고 자신이 어떻게 낮은 가격에 진입하고 높은 가격에 빠져나감으로써 시장에서 최고의 위치에 머무를 수 있었는지 거듭해서 얘기하는 사업가를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들 중에 끼어 있지 않다면 기능에 좋고 수수한 옷을 입는 대신에 최신 스타일의 옷을 입어서 최신의 유행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주변에 넌지시 말해주면서 또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사람들을 그다지 승인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사람들은 진정함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아인 란드(Ayn Rand)가 "세컨드 핸더(second handers)"라고 부른 그런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어떠한 본질적 가치를 달성하는 데서 얻어지는 보람과 기쁨으로 살지 않습니다. 대신에, 다른 이들의 칭송과 칭찬이라는 이차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 이를 먹고 사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컨드 핸더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침착하고 안정감 있는 사람들—그래서 남들의 칭찬과 칭송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커버하거나 자신의 진짜 결점들을 보상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마치 세컨드 핸더처럼 보이게 하는 가르침은 어떤 가르침이라도 의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찬양을 구하시고 숭배받기를 원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신다는 가르침은 많은 이들에 있어 사실상 하나님을 세컨드 핸더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로마서 11:36). 하나님은 항상 계셨고, 하나님 외의 존재는 무엇이든지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인하며, 따라서 어떤 존재든지 하나님께로 말미암지 않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더하여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하나님의 열심 그리고 사람에 의하여 찬양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은 결점 보충을 위한 하나님의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세컨드 핸더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은 그들과 같지 않습니다. 피상적 유사성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영광의 찬양을 구하시는 데에는 다른 동기들이 틀림 없이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단지 그들의 진실되지 않은 면 즉 약점과 결점을 감추려고 하는 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미지와 찬양에 관심이 너무 쏠려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찰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신다는 것이 불쾌하게 보이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 이유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고린도전서 13:5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제 이것은 실로 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고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이 영광받으시고 찬양받으시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으신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사랑하고 계실 수가 있습니까?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니까요. 3주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신다는 성경 구절들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8:11).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우리를 위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십니까 아니면 우리를 위하십니까?
자신의 찬양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여러분을 설복하기를 원하는 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우시고 전적으로 자기 충족적이신 분으로서 독특하신 존재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려면 자신을 위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자기를 높이시는 목표를 포기하신다면, 우리는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자신에게 찬양을 돌리시려는 하나님의 목표와 그의 백성들에게 기쁨을 돌리시려는 하나님의 목표는 하나의 목표이며 함께 서고 함께 넘어집니다. 다음의 질문을 해 보면 이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숭앙할 만한 아름다움과 능력과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 피조물에 대한 그의 사랑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할까요? 다르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가장 사랑이 많은 분임을 우리에게 보이시려면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주셔서 우리가 즐거워하게 하셔야 할까요? 단 하나의 가능한 답이 있습니다. 그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로 좋고 최고로 만족케 하는 것을 주시려면, 즉, 우리를 완벽하게 사랑하시려면,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묵상과 교제를 위하여 그 자신보다 못한 것을 주셔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그의 아들을 보내신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정확한 의도입니다. 에베소서 2:18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3:18절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다시 그에게 나아오도록 사랑 안에서 구속의 모든 계획을 창안하셨습니다. 시편 기자가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6:11)와 같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것—명성, 재물, 혹은 심지어 지금 세상의 삶에서의 건강 등이 아니고 완전히 진행된 하나님과의 교제와 하나님을 보는 것—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찾으십니다.
이제 저에게 있어 거대한 발견이었던 것을 다룰 경계에 와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우리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으뜸되게 사랑하시기 위하여, 가장 좋고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을 우리에게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 자기 자신을 주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뭔가 탁월한 것, 뭔가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우리가 갖게 되거나 보게 될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바로 찬양입니다. 우리는 찬양합니다. 우리는 새로 태어난 어린 아기를 찬양합니다; "오, 저 귀엽고 둥근 머리를 봐요, 저 머리카락들 좀 봐요, 손 좀 봐요, 큼지막하지 않아요!" 우리는 오래 못 본 연인의 얼굴을 찬양합니다; "당신의 눈은 하늘과 같고 당신의 머리결은 비단과 같구료. 오, 당신은 나에게 아름답소." 우리는 9회말 3점을 뒤지고 있을 때 터지는 만루홈런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씨.에스.루이스의 도움으로 제가 발견한 커다란 발견은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우리가 찬양할 뿐만 아니라 찬양 자체가 즐거움의 절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기쁨의 일부분입니다. 루이스가 시편에 관한 그의 책에서 이에 관한 그의 통찰을 묘사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찬양—하나님께 대해서든 다른 것에 대해서든—에 대한 가장 명백한 사실을 나는 이상하게도 오랫 동안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었다. 나는 그것을 단지 칭찬, 인정 혹은 영예를 돌리는 것 정도로만 생각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어떠한가. 어떤 억제하는 감정들 예를 들면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주변의 다른 이들을 따분하게 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같은 감정들이 개입하여 억제하지 않는다면(때로는 그런 경우에도), 모든 즐거움은 자발적으로 찬양으로 흘러간다. 나는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사실 세상은 찬양의 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연인들은 그들의 연인을 찬양하며, 독자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시인을 찬양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은 시골길을 찬양하며, 노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을 찬양한다—날씨, 와인, 음식, 배우, 말, 대학교, 아이들, 꽃, 산, 진귀한 우표, 진귀한 풍뎅이, 때로는 정치가와 학자들에 대한 찬양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하나님은 으뜸되게 존귀하신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있어 내가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가치있게 생각하는 모든 다른 것에 관하여 우리가 행하기를 즐거워하는 것, 우리가 실로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을 어리석게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찬양하기를 기뻐한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은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를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즐거움의 약속된 완성입니다. 연인들이 서로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끊임 없이 얘기하는 것은 그냥 상대를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표현될 때까지는 불완전합니다. (시편에 대한 묵상, pp. 93–95)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찬양으로 표현되기까지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마음대로 말할 수 없다면, 답답할 것이고 우리의 기쁨은 충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기념하고 우리가 숭배하는 것을 찬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쁨은 충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위하신다면,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고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찬양을 얻으시는 것을 그의 목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 안의 어떤 약점을 강화하시거나 어떤 결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우리의 찬양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는 것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우리 기쁨의 충만을 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찬양을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행위가 되는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 가장 높은 덕목이 됩니다. 에베소서 1장이 말씀하듯이 그의 영광의 찬송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하실 때, 그는 우리를 보존하시고 우리에게 우리의 바램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십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자신을 위하셨고 지금도 위하시고 항상 위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호흡이 있든 모든 것들이 주님을 찬양하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