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보고 온전하게 됨: 하나님을 보고 맛보는 것이 정신건강의 핵심
미국 기독상담가협회 콘퍼런스
미국 기독상담가협회 콘퍼런스 강사로 이렇게 서게 되어 영광이며, 겸허한 마음이 들고 제 모습을 감출 수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생각건대 세상 어느 청중이라도 여러분만큼 강사를 꿰뚫어 볼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선이란 문제와 맞닥뜨리게끔 하거든요. 위선의 문제를 늘 수직적 차원에서 마주하는 것이 사실인데 여러분은 그 문제를 수평적 차원에서 마주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든 그가 위선자인지 아닌지 그 속을 훤히 아십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 정서가 그 앞에선 숨김없이 드러나겠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여러분과 이 시간을 함께 하게 되어 좋습니다. 이것은 그럴싸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위험을 일깨우는 경종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먼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 앞에 선 이 강사가 어떤 죄인인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칭찬을 사랑하는 마음을 매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십오 세 사춘기 때와 마찬가지로 예순 셋인 지금도 바보같이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씨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식으로 사랑 받지 못할 때, 뿌루퉁해하고 자기연민을 느끼기 일쑤인 사람입니다.
시간을 최선으로 사용했다는 확신이 들 때가 거의 없으며 그래서 죄의식과 씨름하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부족하고, 분석하여 비평하는 데는 능한 그런 사람입니다.
피곤할 때 감정이 완전히 무뎌져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남의 탓이라 여기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큰 집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무척 좋아하고 자기 거실에서는 영적으로 움츠러드는 사람입니다.
40년이란 세월 동안 아내를 사랑했으나 부족하고 불완전한 까닭에, 3년이 넘게 크리스천 상담가의 상담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교회의 더 나은 형상이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을 어째서 여러분에게 털어놓는지 지금 이 시간을 포함해 도무지 동기가 순수하다는 확신이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한편으로 여러분이 마음을 열고 제 강의를 듣기를 바라고, 제가 먼저 마음을 여는 것이 여러분이 마음을 여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더욱 바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제가 어째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지 여러분이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선 무한한 권능으로 저를 날려버릴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이 점에서 이 콘퍼런스의 주제인 은혜와 진리는 제게 참으로 귀합니다.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시편 63:3, 새번역)
그래서 여기서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시고 부활하고 다스리고 다시 오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도록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기다림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 시간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오니, 이 기독학자들을 잘 섬기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능력에서 영광으로 이동
콘퍼런스 본문 요한복음 1:14이 오늘밤 이 강의의 요지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보여드리고 나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강의제목이 앞서 발표된 것과 다른 데, 강의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그렇습니다. 알고 계신 제목은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능력”이지만, 은혜의 능력이 아닌 은혜의 영광에 초점을 두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에 제목을 붙인다면 “영광을 보고 온전하게 됨: 하나님을 보고 맛보는 것이 정신건강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콘퍼런스 주제 ‘은혜와 진리’의 본문인 요한복음 1:14-16에 간략히 담겨 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요 1:14, 16, 새번역)
사도 요한이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들은 신적인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 영광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마 13:13 새번역)라고 하신 까닭이고, 그것이 베드로에게 “네 혈육이 이것을 네게 알려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다”(마 16:17, 우리말성경)라고 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들은 그 아들[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이 은혜와 진리 – 콘퍼런스 주제가 여기서 나온 것이지요 - 로 충만한 영광이라고 전합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그리고 나서 사도 요한은 충만함과 우리 삶 사이를 연결합니다. 요한복음 1:1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외아들의 영광을 보았고, 은혜 위에 은혜로 그 충만함이 넘쳐흘러 우리에게 임한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확신하는 진리는 이것인데, 이 은혜 – 강력하며, 어마어마한 변화를 일으키는, 신적인 은혜 – 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충만한 그분의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습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에서 비롯되어 우리에게 미치며, 그리스도로부터 우리 마음 속으로 비취는 영광의 빛 – 광선 – 을 따라서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는 그 크나큰 변화는 전부 –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표현할 줄 알든 그렇지 않든 간에 – 그렇게 일어납니다. 고린도후서 3장의 바울의 말을 빌리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고후 3:18, 새번역). 그런 이유로 오늘 강의제목을 “영광을 보고 온전하게 됨”이라고 붙였습니다.
이것이 콘퍼런스 본문 요한복음 1:14, 16의 의미를 간략히 풀어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제 강의의 요지를 더 자세히 이해하고 부제(“하나님을 보고 맛보는 것이 정신건강의 핵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함께 에베소서를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
에베소서 1:4-6은 우리를 영원 과거(eternity past)에서 영원 미래(eternity future) – 만물의 원인에서 만물의 목적까지 – 로 인도합니다. 제가 특별히 관심을 두는 곳은 만물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시고, 타락을 허락하시며, 구속을 계획하시고,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시며, 역사를 인도하셨을까요? 여기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이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것이 에베소서의 가장 궁극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거룩함과 흠 없음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으며, 미리 작정하심과 양자 삼으심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찬송” 보다 더 문자적인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지음 받음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큰 목적 – 즉, 구속 받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 그 목적– 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이 상담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지음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이것을 두 번 더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엡 1:12, 우리말성경).”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다음으로 14절 “이 성령은 우리의 유업의 보증이 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구속하기 위함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우리의 궁극적 유업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고 그 영광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맛보고, 드러낼 것입니다.
정신건강의 핵심
우리가 창조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온전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온전한 경외를 받으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핵심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놀라운 점은 이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온전해지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경외 받으시는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흠 없이 온전하게 되고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온전한 경외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계십니다. 우리는 영광을 보기 위해 – 그 영광을 맛보기 위해, 그 영광을 찬양으로 나타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인간의 온전함(human wholeness)이 궁극적으로 뜻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함이 우리의 최종 목적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맛보고, 찬양하는 것은 온전한 인간다움의 핵심의미가 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맛보는 것은 정신건강의 핵심인 것입니다.
찬양은 그 자체가 목적임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시편사색(Reflections on the Psalms)에서 인간의 모든 찬양 속에 이러한 진리가 담겨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하나님에 대해서건, 다른 무엇에 대해서건, 찬양에 대한 아주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오랫동안 놓치고 있었습니다… 찬양은 기쁨이 자연스럽게 넘쳐나는 - 수줍은 마음에, 혹은 옆에 있는 사람이 지루해할까 봐 일부러 자제하지 않는 한 (때로는 자제함에도 불구하고) – 일이기도 하다는 또 한가지 사실은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찬양소리로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찬양하는 소리, 좋아하는 시인을 찬양하는 소리, 여행지의 풍경을 찬양하는 소리, 좋아하는 게임을 찬양하는 소리부터 날씨, 포도주, 음식, 배우, 자동차, 말, 대학, 나라, 위인, 아이, 꽃, 산, 진귀한 우표, 희귀한 딱정벌레, 심지어 정치인들과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저는 진실로 겸손하며 도량이 넓고 균형감있는 사람들일수록 칭찬을 많이 하고, 괴짜요 적응못하는 자요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들일수록 칭찬에 인색하다는 사실은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찬양이란 건강한 삶을 위한 방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에 바탕을 둔 찬양은 방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찬양이라는 것은 본성상 어떤 수단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찬양은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법은 없습니다. “당신을 기뻐하는 건 내가 즐겨먹는 저녁을 만들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법도 없습니다. “당신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건 내가 건강해지기 위해서지요.” 이것은 찬양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말씀은, 찬양이란 원하는 바를 얻는데 쓰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란 겁니다. 찬양은 무엇을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난, 진실에 바탕을 둔, 하나님 중심적인 찬양은 정신건강의 수단이 아니라 정신건강의 표지인 것입니다.
영광을 보고 온전하게 됨
제 논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함 그 자체가 인간의 온전함의 정점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함은 더 없는 만족을 주는 인간존재의 목적인 것이지 여러분이 그러한 온전함에 이르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그 영광을 보는 것이 이 은혜 – 이 “은혜 위에 은혜,” 온전하게 되는 은혜가 깨어진 우리 인생에 들어오는 방식인 것입니다. 영광을 보고 우리는 온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봄으로 말미암아 그 영광의 광선 아래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은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무엇보다 귀히 여기는 은혜,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은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18, 새번역).
상담에 내포된 엄청난 의미
자,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과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정확한 것이라면, 상담에는 엄청난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법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가운데 우리의 온전함이 정점에 이른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함은 우리의 찬양을 받겠다는 그분의 의지를 한치도 굽히는 법이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매료되어 온통 마음을 그분께 쏟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닫힌 눈을 열고 죽은 마음을 소생시키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영원토록 보고 맛보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고자 힘써 수고하는 그분의 일하심인데, 그 까닭은 하나님을 보고 맛보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온전함의 정점이자 우리 정신건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남을 에베소서 2:4-7에서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로 향하는지 이 성구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가오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보여주다[그리스어로 endeixetai]” (위 성구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주기 위한”에서)란 말은 그저 친절과 호의로 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은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표현하고, 제시하고, 직접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전시(展示)라는 말입니다. 제 논지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에베소서 1:6) 지음 받고 작정되었고,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우리를 위해 더욱더 그 영광의 풍성함을 드러내실 터인데, 이는 우리의 용량이 끊임없이 커져서 그 영광의 풍성함을 보고 맛보고 찬양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라고 합니다. 4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를 살리시고 닫힌 우리 눈을 여셨으며, 다가오는 세대에 더욱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실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 영원토록 알려지고 찬양 받으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끊임없이 늘어나는 선물 – 입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을 보고 맛보는 것이 정신건강의 핵심이며,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우리가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귀히 여기시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것을 영원히 즐거워하도록 그에 필요한 모든 일을 아낌없이 행하시는, 그분의 일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두 번째 함의로 이끄는데 즉,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감정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감정의 의미
이것은 명백한 문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교와 상담에 있어서, 우리가 영적으로 명백한 데서 이탈해 본성적으로 끌리는 데 – 특별히 본성적으로 끌리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하면 - 로 늘 떠밀려 다니는 것이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경우에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하나같이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 인정받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중요시 여김을 받는 경우에 우리는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그토록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 되지 못할까요?
이에 대한 통렬한 경고가 250년 전에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있었습니다:
참된 성도의 마음은 우선 하나님이 행하신 일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영광스럽고 사랑할만한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진 모든 기쁨의 원천이며, 성도가 가진 모든 즐거움의 정수다…. 하지만 위선자들이 느끼는 감정의 순서는 정반대다. 그들은 먼저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우쭐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2
이것이 제가 우려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에 사랑받는다고 느끼고, 그럴만한 자격이 없으나 그리스도께서 어쨌든 나를 사랑하시기에 사랑받는다고 느끼며, 내 죄가 사함 받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둬졌기 때문에 사랑받는다고 느껴야 한다고요. 하지만 무슨 목적으로 그러셨을까요?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가 사함 받았습니다. 진노가 거둬졌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일까요?
이 지점에서 저는 우리 중 다수가 이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내 바람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하나님의 인정, 오로지 그것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시려고 아무 자격 없는 나를 구원하셨다. 나를 중요하다 여기시려고 내 죄를 사하셨다. 나를 중요하다 여기시려고 자기 진노를 거두셨다.” 이것으로 얼마나 영광스러운 기분이 드는지요! 참으로 귀한 복음 아닌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전히 본성적인 생각입니다. 거기엔 아무런 초자연적인 변화도 없습니다. 상담에서 목적하는 회복과 치유 같습니다!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순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나란 존재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함의는 이것인데,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감정이란 다음과 같은 그분의 일하심을 기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상하게 하신 것뿐만 아니라,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과 다투는 어떤 즐거움도, 그에 대한 털끝만한 갈망일지라도 모조리 십자가에서 상하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 또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이 강의를 마치며 제시할 마지막 함의로 인도합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께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이 크나큰 변화는, 타락한 인간에게는 참으로 그 본성에 반하여 일어나는 일이므로,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려면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함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줍니다. 상담에서, 설교에서, 그리고 성도의 인생에서 소망을 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날마다 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7-18(우리말성경)에서 바울은 기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이 표제를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으로 우리가 영광의 아버지를 알 수 있게 - 보고 맛보게 -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가 여러분의 마음눈을 밝게 하셔서 [본성적인 시각이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시각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소망이 무엇일까요? 즉,] 성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여러분으로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가오는 세대에 “우리에게 자비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 유업(엡 2:7)이며,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설교와 상담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는 그 크나큰 변화를 바랄 수 있는 한 가지 유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 없는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맛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 바로 거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일하심이 있을 때에, 비로소 자아에 대한 집착은 깨어지고, 주님의 영광을 보고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1 C. S. 루이스, 시편사색 Reflections on the Psalms [홍성사, 2004] pp. 134-135
2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Religious Affections [부흥과개혁사, 2005] p. 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