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희락주의란 무엇인가
기독교 희락주의란 무엇인가?
기독교 희락주의를 짧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모두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신으로 삼습니다. 기독교 희락주의자들은 가장 큰 즐거움, 즉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을 그들의 신으로 삼고자 합니다.
기독교 희락주의라고 할 때, 이는 우리의 행복이 최고선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최고선을 추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최고의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행복을 추구해야 하며 온 힘을 다해 추구해야 합니다. 행복하고자 하는 갈망은 모든 선한 일을 위한 적절한 동기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기쁨을 향한 추구를 버리면, 사람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게 됩니다.
세속적 쾌락주의와 기독교 희락주의의 차이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도덕과 세속적 쾌락주의의 차이는 성경적 도덕이 자신의 유익에는 관심두지 않고 오직 의무만을 추구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적 도덕은 세속적 쾌락주의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훨씬 더 순수한 것들에 관심을 둔다는 데에 그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 희락주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최종적이고 영속적인 행복의 길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성경적 도덕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성경의 예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6:35는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예수님이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세상적인 것들을 더 늘려나가려는 동기로 행해서는 안되며 미래의 상급의 약속에 의해 손해를 감당할 힘을 얻어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4:12-14는 말합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다시 말해,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선한 일을 하지 말고 영적인 하늘의 복을 위해 선한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의무가 우리의 주요 동기 부여가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말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 구절들은 단지 자신의 유익에 대한 고려 없이 행동할 때 결과적으로 받게 될 상에 대해 묘사하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 상을 구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이 반대의견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있습니다:
1) 50원을 원하는 마음이 약먹는 행동을 타락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만약 이 약을 먹으면 50원을 줄게"라고 말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신 후에 그 복이 순종의 동기가 되었다고 우리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2) 더 중요하게는, 우리에게 미래의 복에 대한 소망으로 선을 행할 것을 권면할 뿐 아니라 명령하는 말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2:33은 말합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여기에서 구제와 하늘의 보물 간의 관계는 우연한 결과가 아닙니다—그것은 분명한 목적입니다: "하늘의 보물을 목표로 하라. 그리고 이를 위해 소유를 팔고 구제를 하라."
그리고 또 누가복음 16:9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누가는 소유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결과로 영원한 처소를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당신이 소유물을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영원한 처소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덕은 즐거움보다는 의무에 의해 고취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만족하지 마십시오.
히브리서 11:6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당신이 상을 바라면서 하나님께 가지 않으면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희락주의적 추구입니다.
기독교 희락주의자들로서 우리는 모두가 행복을 바란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 그들에게 그 갈망을 부인하거나 억누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족하고 싶어하는 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너무 쉽게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족을 원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돈이나 권력이나 음욕에서 만족을 찾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영혼의 갈망을 넘치게 채움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다음의 사항들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고자 합니다.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으며 (사도행전 20:35);
-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빌립보서 3:8);
- 예수님의 모든 명령의 목적은 그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며 (요한복음 15:11);
- 그들이 여호와를 기뻐하면 그분이 그들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며(시편 37:4);
-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며 (디모데전서 6:6);
-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그들의 힘이라는 것을 (느헤미야 8:10) 설득하기 위해 우리는 성령으로 모든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단지 의무에 대한 호소로 동기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으며(시편 16:11) 우리의 유일한 의무는 즐거움을 구하며 그에게 나아오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Adapted from John Piper’s article, Christian Hedonism: Forgive the Label, but Don't Miss the Tru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