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나님은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까?
(이 글은 God Is the Gospel(하나님이 복음이다), 영문판 155-162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창조물 중 우리 인간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시고 또한 이러한 창조를 "매우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매우 중요한 피조물로 여기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 타락한 형상의 회복을 추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한 형상이 단지 이전 상태로 회복되는 차원을 넘어서는 더 나은 것을 계획하시고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닮는 데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린도전서 15:49).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꾸준하게 계속되는 과정이며, 몸의 부활시에 완전해집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우리에게 수여하신 이같은 놀라운 존엄성에 대해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27, 31).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회심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17).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2: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로새서 3:10).
그의 백성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로마서 8:29).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고린도후서 3:18).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 함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몸까지 포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빌립보서 3:21)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영화(glorification)"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30). 그 영광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밝을 것이며, 우리는 기쁨으로 서로를 보기 위한 새로운 눈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마태복음 13:43)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흠 없는 남편을 위해 준비된 신부와 같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깨끗하게 하사...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5:25-27).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부—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화는 새로운 창조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말씀하길 나머지 피조물들은 우리의 변화로부터 변화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21).
이처럼 놀라운 변화의 최종 결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쁨과 칭찬으로 바라보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베드로는 시험과 연단을 겪은 신자들의 믿음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베드로전서 1:7)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진실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로마서 2:29) 고 말합니다. 또한 심판의 날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전서 4:5)고 덧붙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 (로마서 2:7)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통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에 하신 일들로 인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에 바울 자신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는 영광을 볼 것이며 우리는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이제, 위와 같은 결말을 살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구속된 우리는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사할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영광을 볼 것이고 우리는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러한 면에 있어 영원히 진보하는 그러한 사랑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그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은 끊임없이 발견된다. 그리고 점점 더 사랑스러움도 더해간다. 또한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이 아름다움에 있어 영원히 더해갈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사랑의 아름다운 표현들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고 그러한 표현을 점점 더 많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용량을 더해가게 됨에 따라, 우리의 연합은 더 긴밀해지고 우리의 교통은 더 친밀해질 것이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과 또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영원토록 더해 갈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새로운 아름다움은 끊임없이 발견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름다움에 있어 영원히 증가될 것이다." 유한한 마음은 무한한 마음을 완전히 다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기쁨에 대하여 유한한 용량을 갖고 있으므로 무한한 샘에서 솟아나는 모든 기쁨을 한번에 완전히 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올 앞날에는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영원한 증가가 있을 것이다. 2 이는 고린도후서 3:18의 진리가 한번에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멈추지 않고 갈수록 증가해 나갈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우리가 그를 더 잘 볼수록 우리는 더욱 그를 잘 반사할 것입니다—영원까지.
그의 영광의 충만함을 보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안에 약속되어 있고 복음 안에서 얻게 되는 최고의 것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까? 즉, 로마서 8:29("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은 요한복음 17: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에 어떻게 연관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힌트는 로마서 8:29 안에 있으며 또한 이 구절과 골로새서 1:18과의 관련성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로마서 8:29). 바울이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와 같이 말한 그 중대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여기서 "맏아들"(prwto, tokon)이라는 의미심장한 단어는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골로새서 1:18에서도 사용됩니다,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prwto, tokoj)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여기에서 바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많은 형제들 중에서 먼저 나신 이로서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심으로써, 이러한 주님의 탁월하시고 뛰어나시며 영광스럽게 위대하신 모습을 우리가 보고 즐거워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우리의 운명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뛰어나심의 영광을 보고 맛보는 것이 가능하도록 준비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보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사모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녀야 하며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의 구절을 덧붙임으로써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리고 항상 그의 형제들보다 뛰어나신 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의 형제들이 되기 위해—이 또한 맞는 말이며 놀라운 사실이지만—그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만물의 으뜸이 되신" 그분을 온전히 경외할 수 있는 본성을 지니기 위해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의 마지막 부분과 골로새서 1:18과 같은 말씀들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변화에 대한 인간중심적 관점에 쉽게 미끄러지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을 복음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복음의 목표 맞습니다. 영광스러운 목표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을 보고 맛보고 나타내는 그것이 바로 궁극적이 목표입니다.
우리 마음 안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한 개인적 테스트
우리는 몇 가지 질문들로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할까요? 우리의 동기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놓여 있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성품 몇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시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보십시오:
- 내가 그리스도처럼 강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나의 강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우주에서 가장 강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높이는 즐거움보다 열등한 다른 즐거움에 빠지게끔 나를 유혹하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강해지려고 하는가?
- 내가 그리스도처럼 지혜롭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인정받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가장 지혜로운 이를 분별하고 높이기 위해서인가?
- 내가 그리스도처럼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거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보고 음미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방해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인가?
- 내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자가 되고 싶은 것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인정받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고통 중에도 충만한 만족을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을 기뻐해서인가?
여기서 묻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이 모든 영광스러운 성품을 우리가 소유하게 될 것이냐가 아닙니다. 우리는 갖게 될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묻고자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하여서이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30에 나오는 모든 것들—택하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최종 영광의 상태로 데려가시는 이 모든 하나님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기 위한 의도에서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셔서 우리가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보고 그를 중요히 여기는 것에 우리를 적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최종적으로는 되고 보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나타내는 것
아마도 우리는 질문을 최고의 방식으로 제기하기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나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복음이 가져다 주는 최고의 진수인가 질문해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보고 그분처럼 되어야 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까지 나아가지 않고 바로 앞에서 멈춰버렸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둘 중에 그 어떤 것도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좋은 소식으로 만드는 복음의 궁극적인 복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도 그분을 보는 것도 아닌 그분을 기뻐하고 그분을 나타내는것이라고—즉,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고린도후서 4:6)을 기뻐하고 나타내는 것이라고—말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다시 말하면, 결국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고 그럼으로써 그와 같이 되는 것(고린도후서 3:18; 요한1서 3:2)이나 우리가 그와 같이 되고 그럼으로써 그분을 보는(마태복음 5:8; 고린도후서 4:6)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나타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를 마무리하시면서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십니다. 24절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어디에 계시던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있도록 기도하십니다. 신적인 영광을 보는 위대한 복음의 선물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26절에서 예수님의 기도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영광을 볼 때 우리가 얻을 기쁨을 강조하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는 너무나 놀라운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더 위대한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이것은 최고의 기쁨으로 이루어진 사랑입니다. 성부께서는 성자 예수님의 영광을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그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여기서 받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보는 것과 그와 같이 되는 것 그 자체가 복음의 궁극적인 복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더욱 음미하게 하도록 인도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은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 물체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음미하고 즐거워하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주위에 드러내고 반사하고 나타내는 일이 수반되게 됩니다. 이는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일어납니다. 내적으로는 우리의 기쁨의 감정을 통해 우리의 최고의 보물로서의 하나님의 존귀하신 가치를 극대화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만족할 때 우리 안에서 영광받으십니다. 한편, 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행위들이 있게 됩니다. 그런 행위들이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마음으로부터 흘러 나오게 됩니다. 앞에서 물질 세계의 창조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모든 것이 이 지점에서 더욱 중요하게 대두됩니다. 모든 창조 세계는 눈에 보이게 물리적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투영하고 나타낼 것이며, 특히 구속받은 인간은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는 영적일 뿐 아니라 물리적, 육체적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리스도를 높이는 기쁨과 부활한 우리 육체의 그리스도를 높이는 행위는 모두 하나님을 영광을 드러내고 알리게 할 것입니다.3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과 그분을 보게 되는 것이 복음의 궁극적인 선물이 아니라면,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되고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여야 할까요? 즉,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베드로후서 1:4)과 "그의 아들과 같이" 되는 것(로마서 8:29),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요한복음 17:24)에 대해 무엇을 말하여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신 것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무엇을 말하여야 할까요?
신적 영광을 증가하는 계시의 끝없는 물결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존재, 또는 우리의 실재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존재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율과 경외로움으로 가득한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하여 존재하며, 하나님을 통해 존재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합니다(로마서 11:36). 복음의 궁극적인 최고의 선은 자기에게 감탄하는 것이나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은 죄인이 붕괴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기뻐하시는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뻐할 수 있게 되고, 이러한 기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행위를 눈에 보이는 행위들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그분을 보는 것의 바탕이 되며, 이처럼 그분을 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 을 음미하고 기뻐하는 것의 바탕이 되며, 이러한 충만한 기쁨은 이제 넘쳐흐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눈에 보이게 나타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의 복음은 우주적이고 공적인 차원에서 그 최종적 목표에 도달하게 됩니다. 단지 개개의 개인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성도들과 피조물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인 영광의 계시의 물결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며, 영원히 더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에 의해 중재되어 아버지의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때, 장차 올 새 땅은 우리의 사랑과 창조성의 눈에 보이는 행위들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의 생명, 서로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의 새로운 차원은 매일 우리의 새로운 기쁨들과 새로운 행위들로 찬란히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보는 새로운 방법들이 됨으로써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행위들을 이끌어낼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계시하는 물결은 영원히 증가하며 영원히 그 역할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결은 복음의 크고도 최종적인 복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명백하게 할 것입니다. 4
1 조나단 에드워즈, The “Miscellanies”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13권(뉴헤이븐: 예일 대학교 출판사, 1994, 영문판 pp.336-337) (Miscellany #198)
2 "만약 어떠한 변화가 생긴다면, 이는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에 대한 더 나은 지적인 인식과 지식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끊임없고 점점 더 사랑스러운 교통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그릇이 증가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께 대한 예배 안에서 영적인 나라를 더 크게 찬양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임스 페티크루 보이스(James Petigru Boyce), 조직신학 요약 (Abstract of Systematic Theology) (Escondido, CA: Dulk Christian Foundation, nd, orig. 1887), pp. 475-476.
3 조나단 에드워즈는 우리가 부활한 육체를 가진 이후의 다가올 세대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의 육체적인 오감과 기쁨들과 영적인 기쁨들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이처럼 외적인 감각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외적인 영광을 보는 것 안에서 즐거움을 취할 것이며, 그 정도와 처한 상황 안에서 신적인 영적 영광을 보는 영적인 시각에 전적으로 완전하게 복종할 것이며, 외부적 표현으로서 이 영적 시각의 외관을 형성할 것이며, 성도들이 지닌 우월한 영적인 기쁨에 복종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육체가 모든 면에서 영적인 육체가 되는 것이며 영적인 행복감에 복종하고, 거기에는 무질서나 과도함 혹은 외적 감각이 전체를 지배하려는 위험이나 경향성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눈에 보이는 영광은 영적인 영광의 감각에 복종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이 거룩한 감정과 마음의 기쁨에 복종하는 것과 같으며, 훨씬 더 즉각적으로 일어나는데, 왜냐하면 음악은 하나님의 조화를 그렇게 즉각적으로 나타내지는 않지만 우리의 육신의 눈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게될 것이기 때문이다."The “Miscellanies”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18권 (뉴헤이븐: 예일 대학교 출판사, 2000, 영문판 p.351)
4 이러한 최종적 생각들은 '우리 모두를 위한 싸움'(Contending for Our All, Wheaton:Crossway Books, 2005)이라는 책 속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들을 고무시켜 준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 콘트라 문둠: 아타나시우스의 삶 속의 망명과 성육신"(“Contending for Christ Contra Mundum: Exile and Incarnation in the Life of Athanasius.”) 이라는 장 안에서 그 빚을 갚으려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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