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두려움이 자리할 곳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자리할 곳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안에는 두려워하라는 명령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1:20을 보면, "옳도다 그들[유대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3:12도 믿지 않음("두려움"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두려워하라고 주의를 주는 다른 본문들: 베드로전서 1:17; 2:17; 빌립보서 2:12-13; 누가복음 12:5; 이사야서 66:2; 사도행전 9:31; 고린도후서 5:11; 7:1; 등.)
흩어진 조각들 맞추기
하지만 우리는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누구는 두려워하라고 권하고 (사도 바울, 히브리서), 다른 누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요한)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로마서 11:20이 두려워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지만, 로마서 8:15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3:12이 믿지 않는 심령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훈계하고 있지만(믿지 않음을 형벌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히브리서 4:16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신약 성경의 저자들 사이의 의견충돌이 아니라, 어째서 같은 저자가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라!" 고 말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 말라! 담대하라." 고 말할 수 있느냐입니다. 제 생각에, 이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그분의 자비로우심을 신뢰하도록 하며 이러한 "떨리는 신뢰"는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좀 더 분명하게 보게 됨에 따라 우리를 이끌었던 두려움을 서서히 없애 나갈 것이라는 의견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어떻게 두려움을 내어쫓는가
C.S. 루이스의 조지 맥도널드 선집 (홍성사, 홍종락 역, 2011)을 읽는 중에 도움이 될 만한 구절들을 찾았습니다. 그는 완전한 사랑 외에는 그 아무것도 두려움을 쫓아낼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두려움을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두려움을 없애는 단 하나의 방법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하기를 그치면 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때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완전함은 반드시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두려움을 쫓아낸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이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무디게 하고 제거해 버리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두려움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같은 불편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모든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함으로써, 또는 흔하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전심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모든 명령들을 제거함으로써. 신명기 10:12을 보십시오.)
맥도널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01 페이지),
여전히 자신의 의지와 사랑에 빠져있고 격렬한 충동의 지시에 일일이 따르는 노예 같은 그들에게 두려움은 천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며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하나님을 버려진 우상과 미신, 거짓으로 취급하고, 그들을 오랫동안 신음하게 만든 악한 영향력으로 여기며 쫓아내고 침 뱉고 모욕하지 않겠습니까?
두려움보다 우월한 사랑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하지 못한 결속이며, 이는 무한히 더 가까운 결속—즉, 사랑으로 맺어진 결속(101페이지)으로만 대체될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두려움을 내어쫓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은 어느 지점까지만 그 역할을 하고 다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두려움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다시는 자리하지 않게 되는 지점은 바로 신자의 사랑이 완전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아직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이 사그러들지 않으면서 매 순간을 보내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하여 전혀 현혹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 가운데 매 순간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순간들은 우리가 바울(로마서 11:20) 또는 히브리서의 저자(3:12) 또는 예수님께로부터(누가복음 12:5)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는 시점입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결코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의해 완전히 지배받고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완전히 믿음에 의해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자로써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그 자체로 은혜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우리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돌이키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로우심을 신뢰함에 따라 두려움이 없어지게 하는 그런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불완전한 성도들을 위한 적합한 종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어메이징 그레이스)"의 2절의 가사는 단지 평생 단 한번 뿐인 경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본문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영문 가사를 재번역함 (역자 주) *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신 그 은혜,
두려운 마음을 안도하게 하신 그 은혜,
귀하신 그 은혜,
내가 처음 믿었던 그 은혜.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는 사랑과 두려움
1974년 1월 7일, 저는 다음의 글을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앙감정론 (부흥과개혁사, 정성욱 역, 2005), 268쪽에서 찾았습니다. 이 글은 바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법에서 사랑이 식어지고, 사랑이 그치거나 약해지면, 두려움이 일어나도록 사물들을 만드시고 사물의 질서와 본질을 규정하셨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죄짓는 일을 삼가게 되며, 자신들의 영혼의 유익을 돌보아야겠다는 자극을 받게 되고 믿음이 각성되어 신중해지고 근면해지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생기고 활발하게 역사하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쫓겨나도록 사물의 질서를 정하셨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더 높고 더 탁월한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삼가고 의무를 다하도록 각성시키는 데에 두려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영향을 주는 원리 가운데서 언제나 사람들을 양심적으로 만드는 것은 두려움과 사랑 둘 중의 하나다. 따라서 이 둘 중의 하나가 약해지면서 다른 하나가 우세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명이 없는 육신적인 삶으로 타락할 때, 즉 사랑이 잠들었을 때, 그들은 진정 슬프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천칭의 두 접시들과 같이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이 상반되는 원리 가운데 하나가 일어나면 다른 것은 사라지도록 질서를 확립하셨다...
두려움은 오직 성령께서 사랑으로 이기게 하시고 다스리실 때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이기게 하지 않으시고 다스리지 않으시면 사랑이 식어져 버리고 만다...